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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고통 받는 사람 앞에서

by 분당교회 2016. 8. 21.

고통 받는 사람 앞에서

재작년 한국을 방문한 로마교회의 프란체스코 교황에게 기자들이 교황께서 세월호 유족들의 손을 잡아준 것이 종교인의 정치적 중립을 어긴 것 아니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프란체스코 교황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 앞에서 중립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고통 받는 약자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늘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치유하며 벗이 되어주셨습니다. 벗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들과 같은 입장에 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과 무거운 인생의 짐을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일반적으로 높은 사람, 가진 사람들이 낮은 사람, 약자들에게 위에서 아래로 자비를 베푸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식사를 하고 그들의 집에 머물기까지 했습니다. 그들 역시 ‘소외’라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가 죄인들과 한통속이라고 인식했으니까요. 이렇게 고통 받는 사람 앞에서 예수께서는 중립적이지 않으셨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 앞에서 ‘중립’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 중립은 공정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관계없음’ 또는 무관심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18년이나 병마에 사로잡혀 허리가 구부러진 여인을 치유하셨습니다. 이 때 회당장은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일주일에 6일이나 있는데 하필이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냐고 항의합니다. 예수께서는 짐승들조차도 안식일이라 해서 외양간에 가두어 두지 않고 풀어 주어 물을 먹이면서 18년 동안이나 사탄의 사슬에 매여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고쳐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했습니다. 법 뒤에 숨은 비정함과 잔인함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눈앞에 있는 고통 받는 약자들을 방치해 놓은 상태에서 안식일 법을 지킨다는 것은 위선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안식일 법을 지키라는 회당장에게 그 병들어 고통 받는 여인에 대한 연민이나 관심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죄인취급하고 멀리 했을 것입니다. 그것도 당시의 법이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당시의 법은 매우 편리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약자들의 소외나 고통을 보고도 책임감을 느끼거나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정해진 법만 지키면 아무 문제도 없고 고민할 것도 없으니 자기만 잘 하면 되지 않았을까요?

예수께서는 가치 판단의 우선순위를 사랑에 두셨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에 두셨습니다.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당신들도 존중해야 할 이웃인데 사탄의 사슬에 묶여있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율법을 내려주실 때의 목적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고 고통 받는 인간의 해방이었던 것입니다. 안식일 법을 규정한 법조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였으니까요. 법조문보다 위대한 것은 신앙적 사랑이며, 신앙적 사랑이란 이처럼 적극적이고 주체적이며 이웃에 고통에 동참하는 사랑입니다. 

‘사정은 이해합니다만, 법이 이래서...’ 딱하고 안타까운 일을 겪는 사람들이 관공서 데스크 앞에서 흔히 들을 수 있을 만한 대답입니다. 공무원의 무심함보다는 법의 비정함이 원망스러운 상황이 얼마나 많은지요. 법은 사회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해서 그리고 억울한 일과 악행을 줄이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법은 냉철해야 하고 정의로워야 합니다. 법원 앞에 천칭을 든 여신이 눈을 가리고 서 있는 것은 그만큼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공정하게 판단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서 만사를 법에만 의존할 경우 장발장을 쫓던 자베르 경감 같은 경우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는 법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오로지 범법자들을 처단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던 그가 용서를 체험하고 완고하고 냉혈인 마음에 조금씩 변화가 일어납니다. 법보다 더 위대한 것이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훌륭한 일들을 보고 군중은 모두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고침을 받은 것도 아닌데 기뻐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기쁨은 무엇을 말할까요? 그 기쁨이란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의 행위에 대한 공감이며 동참의 뜻이 아닐까요? 한 병자의 치유를 넘어서서 자신들에게 하늘나라가 다가왔음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기쁨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8월 21일 연중 21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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