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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관계 형통의 명약

by 분당교회 2016. 8. 29.

관계 형통의 명약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소망하고 또 그 행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행복의 비결은 재물의 소유나 사회적 성공 여부보다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느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특히나 인간관계가 어떠한지에 따라서 행복의 질량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영적 충만으로 나타나며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속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을 누리게 합니다. 또한 인간관계를 통해서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사랑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러한 수평과 수직의 관계를 가로막는 요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관계가 끊어진 점으로 고독하게 살아갑니다.

“최근 한 배우가 내게 자기의 직업 세계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 이야기는 오늘날 상황의 많은 부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 같았다. 사랑과 부드러움과 친밀한 관계를 묘사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습하는 동안에도 배우들은 서로를 시기하는 마음이 있으며, ‘잘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무대 뒤의 장면은 증오와 가혹함, 서로에 대한 의심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서로 입을 맞추는 사람들도 무대 뒤에서는 서로를 치고 싶은 유혹을 받으며, 무대 조명을 받을 때는 인간의 가장 심오한 사랑의 감정을 그리던 사람도 조명이 꺼지자마자 적대적인 경쟁심을 나타낸다고 한다.”(헨리 나우엔, ‘영적 발돋움’에서)

대부분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도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무대 위에서는 배우들이 평화와 정의와 사랑을 표현하고 연기하지만 속으로는 적대감을 품고 서로를 넘어서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경쟁사회에서 또는 여러 역할들이 분화되어 있는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것을 솔직하게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 쇄신을 위한 노력을 통해서 적개심과 시기심을 버리고 관계를 회복하는데서 우리 신앙의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관계를 회복하고 형통하게 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겸손과 환대입니다. 

‘너는 초대를 받거든 오히려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윗자리에 앉으라고 할 것이다.’(루가 14:10)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루가14:13)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마음에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아니, 겸손한 사람만이 하느님의 은총을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겸손의 반대인 교만은 항상 슬그머니 우리의 실적이나 지위, 권력, 외모, 재산, 학력 등등을 드러나게 함으로서 관계를 깨뜨립니다. 이 교만이야말로 은총의 파괴자이며 관계를 깨뜨리는 사탄이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만 가지 달란트를 가지고 재능을 뽐내는 사람도 겸손함이 없고 교만하다면 그 은총의 선물들을 다 무효화시킵니다. 사람들로부터 존중받을 수가 없습니다. 겸손함이 없기에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것들을 자기가 잘나서 가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만한 사람의 마음은 딱딱한 바위와 같아서 하느님의 말씀의 씨앗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합니다. 하느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말 잘 하는 사람이나 재주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느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진실을 주변 사람들은 존중하고 관계를 형통하게 합니다.


(아브라함과 세 방문객들, 마르크 샤걀)

겸손한 사람들은 나그네를 환대할 줄 압니다. 아브라함이 상수리나무 아래서 세 명의 낯선 사람을 맞아 그들에게 물과 빵과 부드러운 송아지 고기를 대접했을 때 그 낯선 사람은 하느님으로 나타나고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말해 줍니다. 사렙다의 과부가 엘리야에게 먹을 것과 잘 곳을 마련해 주었을 때 엘리야는 자신이 하느님의 사람임을 나타내고 그 과부에게 많은 기름과 식량을 주고 죽은 아들을 살려주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길에서 만나 같이 걷던 낯선 사람에게 하룻밤 같이 묵자고 청했을 때 그 나그네는 자신이 구세주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은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다시 만날 지도 모르니까요. 더구나 가난한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손님을 존중하고 정성껏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 손님이 바로 하느님일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늘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겸손과 환대는 흔한 처세술이 아닙니다. 우리 구원의 통로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8월 28일 연중 22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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