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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자기 십자가

by 분당교회 2016. 9. 5.

자기 십자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어디서 구해오라거나, 새로 만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우리 각자에게 이미 주어진 십자가가 있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는 발견하는 것이지 만들어 내거나 어디서 구해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십자가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무시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고, 또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그것을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늘 십자가를 바라만 봅니다. 아니면 액세서리로 몸에 지니는 물건으로 여기고 이를 통해 예수께서 주시는 은총과 선물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부여된 고유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에 동참하고 그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충실히 짊어짐으로서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와 자기 십자가를 비교한다거나, 자랑할 일도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피할 수 없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누구한테나 있다면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생활과 기도의 가장 중심이 될 것입니다. 

어떤 학자가 불만에 가득 차서 하느님한테 항의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불행하니 몹시 불공평하다고요. 하느님은 왜 이런 불공평한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고 또 사람마다 다 제각각 능력도 외모도 다 다르게 말들었냐고요. 하느님은 그의 말을 다 듣고 그를 요르단 강으로 데려갔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살이를 마치고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경계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강을 건너왔습니다. 하느님은 그 학자한테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이 지고 온 십자가의 무게를 다 달아보아라. 그래서 사람들의 십자가를 모두 달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큰 십자가도, 작은 십자가도 그 무게는 다 똑 같았습니다. 심지어는 나무 십자가도, 강철 십자가도 무게는 같았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학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하느님을 쳐다만 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이 이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줄 때 누구에게나 똑 같은 무게의 십자가를 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웃으면서 가볍게 안고 살고,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워하면서, 또 불만에 가득 차서 무겁게 짊어진다. 

모든 사람의 삶의 무게는 같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자기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행복과 불행이 갈라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장애가 있는 가족이 있는 경우,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칠 경우, 갈등이나 희생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는 경우 우리는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를 의심하기도 하고 그 십자가의 무게를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감당할 만큼의 십자가를 준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막상 큰 불행을 겪은 사람한테 주변에서 이런 소리하면 더 부아가 치밀어 오를 수도 있지만요. 본인이 새겨야 할 말씀이겠지요.

닥쳐오는 불행과 시련 말고도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담대히 짊어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의를 위해서 선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들이 보여준 위대한 희생들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또한 교회나 가정 또는 이웃과의 삶에서 공공의 유익을 위해 자기의 욕망과 한계를 뛰어넘은 헌신 속에서도 자기의 십자가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발견하고 짊어지는 데는 영적인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라는 말의 courage는 라틴어의 cor에서 왔는데 그것은 ‘마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즉, 용기 있는 말과 행동은 마음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단순히 우리의 감정이 아니고 우리 존재의 중심이며 모든 생각과 느낌, 열정의 중심입니다. 때문에 용기 있는 삶이란 중심에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때문에 나의 중심에서 솟아나는 소리를 들음으로서 얻는 용기로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굴하고 위선적이며 나약한 것은 우리를 안일하게 살아가려는 욕망이 만든 포장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닮을 가능성을 우리의 중심에 담아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형상이겠지요.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9월 4일 연중 23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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