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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뱀 같은 슬기

by 분당교회 2016. 9. 19.

뱀 같은 슬기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마태 10:16) 예수께서는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 순결하고도 도덕적인 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매우 험난하고 위험하기도 합니다. 너무 순진해서 속기도 쉽고 이용당하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순수한 신앙인이 가져야 할 것이 바로 뱀 같은 지혜입니다.


어떤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고 하기에 주인은 그 청지기를 해고하려고 합니다. 청지기는 실직을 하면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해서 꾀를 내어 빚진 사람들을 불러다가 대출 장부를 조작합니다. 기름 백말을 빌린 사람은 오십 말로, 밀 백 섬을 빌린 사람은 팔십 섬으로 적게 해서 훗날 이들이 자신을 돌보아 주게끔 인심을 씁니다. 아마 이전에 주인의 재산을 낭비할 때 부정 축재는 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렇게라도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것을 보면 모아놓은 재산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 부정직하고 불의한 청지기를 오히려 칭찬을 합니다. 예수께서 사기꾼을 칭찬하시다니 이해하기가 참 어려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것은 그 사기 행위가 정당하거나 잘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예수께서는 ‘약삭빠르고 영리하게’ 자신의 위기를 헤쳐 나가는 청지기의 뱀 같은 슬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장부를 조작하는 청지기의 눈에는 절박한 빛이 반짝였을 것입니다. 사활을 건 모험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일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온유한 눈빛과 가슴으로는 그 위기를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둠의 자녀들이 현실에서 빛의 자녀들을 몰아내는 힘은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빛의 자녀들이 지독한 현실을 외면하고 나이브하게 대처한다면 현실은 오히려 어둠의 자녀들이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빛의 자녀들이 슬기 없는 이상만을 추구했다고 해서 반드시 올바르다, 또는 적절하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의 사악함과 이기심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아가페적 사랑이 실현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이고 양심적이며 사랑을 베풀 수 있지만 사회 속에서 특히 집단 속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인간(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으나 사회는 비도덕적이라고 하는 것이 그의 유명한 주장입니다. 매우 현실적인 분석입니다. 그래서 감상적이고 피상적인 도덕만을 주장하고 교육으로 사랑을 실천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고 했습니다.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학살과 전쟁이라는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오는데 평화의 원칙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잔인한 평화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평화와 사랑이라는 궁극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정의’라는 현실적인 가치를 먼저 이루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빛의 자녀는 어둠의 자녀가 가지고 있는 지혜를 갖추어야 하지만 그들의 사악함과는 무관해야 한다. 빛의 자녀는 인간사회의 이기심의 힘을 알아야 하지만 그것에 도덕적 정당성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공동체를 위해서 이기심을 속이고 이용하고 억제하기 위해 그러한 지혜를 가져야만 한다.’(라인홀드 니버,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작가 공지영은 소설 ‘도가니’에서 장애인들이 학대받는 현실을 감추려는 불의한 세력들의 엄청난 협잡과 음모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렇게 씁니다.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 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가리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외면  당하는 데도 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곳으로 돌아간다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진리이기는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바른 곳으로 돌아가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엄청난 불의의 지배를 참고 견뎌야 하는 어려움이 존재합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이 강요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실이 게으르고 교만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빛의 자녀들이 태만하지 않고 어둠의 자녀들이 가지는 슬기를 활용할 수 있다면 그만큼 정의가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9월 18일 연중 25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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