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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존 웨스터호프의 성공회 신앙의 이해4_ 성공회 영성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7. 18.

4. 성공회 영성


웨스터호프는 “결국”(in the end) 성공회를 하나로 묶는 것은 공동기도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매일의 일상생활을 강조한다. 다른 별난 체험의 자리가 아니라 일상생활이 하느님과 관계를 깊이하고 참된 자신을 만나고 타인과 피조세계와 만나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공동기도와 일상생활이라는 두 요소를 언급하면서 웨스터호프는 성공회 영성 이야기를 시작한다. 개인의 사적기도와 초자연적 체험을 영성생활의 초점으로 올려놓는 것은 적어도 성공회의 특성은 아니다. 어반 홈즈도 말했거니와 성공회는 일상성을 소중히 여기는 영성을 갖고 있다. 본디 성무일과의 의의가 그러하듯 공동기도는 자칫 무의미한 일상의 의미를 일깨우고 기억하는 역할을 한다.

(1) 성공회 영성은 전례적이며 성서적이다(Liturgical/Biblical)

매일 드리는 공동기도는 성공회 영성의 뿌리다. 기도서에는 네 개가 나오니 아침기도, 낮기도, 저녁기도 그리고 밤기도다. 얼른 생각해봐도 다른 교파에 비해 정형화된 의식을 통해 영성을 기른다는 특성이 드러난다. 웨스터호프는 성공회신자는 대개 기도서의 정해진 기도문을 외우며 기도하는 것 말고 자발적이고 즉흥적인 기도는 그리 편치 않아하는 점을 언급한다. 그리고는 기도서로 드리는 전례적 기도란 성서에 입각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우리 성공회는 매일 의식적이고 정형적인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찬미, 감사, 회개, 봉헌, 대도(혹은 중보기도)와 청원을 드리는 전통이라고 말한다.

이쯤에서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당혹감을 금치 못한다. 주일성찬례를 빼놓고 매일의 공동기도란 거의 유명무실하다. 매일의 전례를 통한 영성배양이 성공회의 길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성공회적인가? 게다가 신앙의 근본을 성서로 세우되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예배의 맥락에서 성서를 해석하게끔 의도한 것이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의 기도서다. 그 기도서로 드리는 성공회 전례를 종교개혁의 개혁대상이었던 비성서적 중세교회의 전례인 양 비판하는 착시현상마저 엿보인다. 먼저 알고 이해한 다음 비판하는 것이 지적 에티켓이다. 중세가 라틴어를 몰라서 성서와 예배에 문맹이었다면 지금 우리는 성공회전통과 유산을 이해하지 못해서 오는 문맹도 만만찮다.

Rev. Dr. John H. Westerhoff

(2) 성공회영성은 공동체적이다(communal)

성공회는 늘 공기도가 사적인 기도보다 앞선다. 전자가 후자를 빚는다. 그래서 개인기도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회는 기도가 개인적이고 사적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이런 연유로 해서 기도서를 통해 굉장히 폭넓은 시야로 기도하는 대도(代禱)를 중시한다. 사실 기도서란 우리가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훈련하는 책이다. 그래서 기도서다. 그리고 전례력(혹은 교회력)을 따라 같은 주제, 같은 초점을 갖고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 웨스터호프는 영성생활을 사적으로만 소비하는 것은 성공회영성에 “반하는 것”(antithetical)이라고 단언한다.

성공회는 무엇을 판단할 때 초대교회 전통에 호소하는 특성이 있다. 공기도를 사기도보다 앞세우는 것도 초대교회적 특징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유다교의 매일 세 번 드리는 공동기도의 전통에서 탄생한 초대 그리스도교도 매일 두세 사람 이상이 모여 함께 드리는 기도가 핵심이고 개인기도는 거기서 파생되는 걸로 보았다. 물론 개인기도와 공동기도는 서로를 세워주고 채워준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교는 초대교회 때부터 공동기도에 더 무게를 실었다. 기도생활, 영성생활을 나와 “내 영혼의 구세주”의 일대일 관계에 두고 교회도 그 배경이 되어주는 역할로 이해하는 방식이란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서 등장한 지 얼마 안 되는 것이다.

성공회는 의회로 모였을 때도 무언가 회의를 통해 결정을 할 때도 늘 기도서를 통한 예배를 드린다. 본디 성공회기도서란 기도와 예배의 맥락에서 성서를 읽으면서 하느님의 진리를 찾자는 것이다. 이상과 현실은 늘 간극이 있게 마련이라지만 현실에서는 이 예배가 요식행위로 전락하기 일쑤다. 예배드리면서 일껏 함께 성서를 듣고 하느님 앞에 서있는 공동체임을 기억한다고 하지만 이후 이어지는 회의는 전혀 별개다. 각자의 입지와 이해관계가 하느님의 뜻을 대신한다. 그래도 애써 기억하자. 모였을 때 공동기도는 본론에 앞선 전단계가 아니라 전체과정을 감싸는, 하느님의 마음을 찾는 식별의 톤을 마련하는 시간이다. 이렇듯 성공회는 성서해석, 기도와 식별을 공동체전례 안에서 하려는 영성을 갖고 있다.

(3) 성공회영성은 성사적이다(Sacramental)

성사의 정의는 “내적이며 영적인 은총을 외적으로 보이게 드러내는 표지”다. 웨스터호프는 성공회에는 두 개의 큰 성사(세례와 성찬례), 다섯 개의 작은 성사(견진, 혼배, 조병, 화해, 성직서품)가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개신교는 두 개의 성사만 인정하고 천주교는 칠성사 즉 일곱 개 성사를 다 인정한다. 성공회는 중요한 것, 덜 중요한 것으로 구분해 양편을 다 수용한 셈이다. 그런데 사실 2성사냐 7성사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웨스터호프는 성사의 목적에 밑줄을 친다. 성사를 드림으로써 우리가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더 의식하고 자각하게 되는데 그것이 성사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웨스터호프는 우리 성공회 신앙은 성사와 같은 상징 혹은 상징적 행위가 풍부한 전통임을 말한다.

하지만 그 모든 성사와 상징이 결국 매일의 생활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혹은 안에서) 살게끔 하려는 것임을 기억하면 성공회영성의 특성은 더 뚜렷해진다. 성공회는 비일상적이고 초자연적, 영웅적 행위보다는 소소한 일상의 영적의미를 더 강조한다. 그래서 성공회영성에는 기둥 위에서 초자연적 수행을 한 은수자들보다는 부엌에서 일상활동을 하며 영성을 드러낸 로렌스 같은 이가 더 모범에 가깝다. 성공회영성의 이러한 일상성 강조는 다시금 초대교회적 특성과 맞물린다. 성 어거스틴은 304가지 성사를 언급했다고 한다. 결국 일상의 모든 것이 성사 즉 ‘거룩한 일’이 되게 하라는 의미다. 그런데 하느님 홀로 거룩하시니 빨래하고 일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과 더불어, 그분의 현존을 의식하는 가운데 하면 그 일이 곧 성사가 된다. 교회의 예식으로서 성사는 다 이 목적에 기여하려는 것이다. (이주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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