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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존 웨스터호프의 성공회 신앙의 이해3-2 : 이성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7. 18.

3-2 이성

성공회가 16세기 종교개혁에 동참하면서도 “오직 성서”라는 구호를 따라하지 않고 “이성”과 “전통”을 더하였다. 개혁파가 강조하는 성서나 로마교회가 강조했던 전통(교회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나 이미 이성의 역할이 거기 있을 수밖에 없다는 자각 때문이다. 이때 이성이란 인간이 자기 경험을 돌아보고 숙고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성서든 전통이든 이성과 무관하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는 것이 처음부터 성공회가 가진 눈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성서 자체가 애초의 기록을 자신의 상황에 비추어 해석하되 앞선 해석을 참고하면서 기록한 것이다. 성서-이성-전통이라는 세 요소는 늘 삼위일체처럼 함께 작동하게 마련이라는 방법론적 성찰을 통해 성공회는 종교개혁 당시 서로 대립하는 양편을 품을 수 있는 넓은 울타리를 마련한 것이다.

웨스터호프는 성공회가 이성이라고 할 때 사물을 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힌다. 즉 논리적 분석이나 추론 이상으로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아는 능력, 그래서 경험을 기도하면서 성찰하는 능력, 소위 ‘관상적 성찰’(contemplative reflection) 같은 것을 더 강조한다. 여기서 떠오르는 그림은 이와 같다. 자기 시대의 경험과 새로 얻은 지식에 비추어 성서와 전통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하는 모습. 거꾸로 성서와 전통에 비추어 자기 경험과 지식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아보는 모습. 이것이 성공회가 이성을 말할 때 기본적으로 떠올리는 그림이라 하겠다. 웨스터호프가 굳이 짚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능력, 그 긴장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불안이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불안의 저주를 피한 것 같은 지도자와 교회의 가르침은 각광을 받는다. 성서의 이름으로든 전통, 이성의 이름으로든 쉬운 답, 단호한 가르침은 일단 안정을 주는 것 같지만 작은 삶의 굴곡, 경험만으로도 사상누각처럼 무너진다. 성공회 정신은 늘 대화하고 식별하는 긴장관계를 기꺼이 감수하고자 한다. 그래서 가끔 성공회는 뭘 믿는지 모르겠다는 불평도 듣지만 사물을 깊이 들여다보는 시선을 갖게 하는 것도 성공회풍의 미덕이다.

흔히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음을 강조하는 개신교 영성은 인간의 이성도 불신하는 경향으로 흐른다. 그래서 은총도 인간과 무관하게 하느님의 주권적 개입으로 “저 밖에서” 다가오는 타자(他者)적인 걸로 강조한다. 반면 인간이 타락했으되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라는 로마가톨릭적 관점은 은총도 인간 내부의 덕성과 성향을 제대로 작동하도록 “내 안에서” 돕는 것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앞의 입장이 아예 고장 나 멈춰버린 시계라면 뒤의 입장은 비록 삐걱거리면서 잘 안 맞을지언정 작동은 하는 시계와 같은 차이가 있다. 성공회는 어느 입장에 더 가까울까? 웨스터호프에 따르면 후자 쪽에 가깝다. 즉 인간의 이성은 타락으로 해서 약해지긴 했지만 완전히 고장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을 입으면 하느님의 진리를 식별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긍정적인 힘과 기능을 갖고 있다.

웨스터호프의 설명은 이성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무엇이기보다 은총의 도우심을 입을 때 제대로 역할 할 수 있는, 즉 은총에 의존적인 이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성공회는 성서를 자기 상황에 비추어 알아들으려는 이성적 해석 작업이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은총의 맥락 안에서, 그것도 공동체가 검증하고 인준한 성직자(주교의 안수로 상징되는)가 이끌고 공동체가 서로의 오류와 극단성을 거르고 조율하는 공동체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한편 기도 안에서 묵상하듯, 하느님과 관상적으로 일치해서 직관적으로 파악하듯 작동하는 이성이란 머리 중심의 지성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그래서 어반 홈즈라는 성공회 신학자는 성공회가 말하는 이성이란 “신비주의적 이성”이라고까지 말했다. 웨스터호프의 “관상적 성찰”에 상응하는 말이다. 윌리엄 컨트리맨이 “성공회 영성은 시적 상상력”이라고 했듯 시적으로 파악하는 이성이기도 하다. 어느 쪽으로 봐도 메마른 이성주의(rationalism)와는 거리가 먼 것이 성공회의 이성이해다. 그러므로 “성공회는 이성적인 교회”라는 말로 성공회가 이성주의에 지배되는 분위기 교회인 듯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건 다만 왜곡된 현실일 뿐.

한편 웨스터호프는 이성주의도 이단이지만 지성은 부정하면서 감정과 정서만 쫓는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도 이단이라고 말한다. 늘 포괄적인 성공회는 이성을 말할 때에도 지성과 정서, 직관을 다 포괄하면서 이해한다. 그런데 하물며 이성의 중요한 한 기능인 지성을 박탈할 리가 없다. 사실 감정적 경험을 중시하는 복음주의자라 해도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은 늘 지적인 면모를 보인다. 존 웨슬리만 해도 말을 타고 다니는 전도여행 중에도 늘 책에 코를 박고 말을 탔다고 한다. 그러니 성공회는 이성적이라면서 가슴중심의 영성을 부인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반대로 지성을 외면하는 것 역시 성공회에는 낯설다. 이것만 기억하자. 성공회는 전체성을 존중한다. 이성을 말할 때도 이성의 모든 기능(지성, 감성, 상상력 등)을 존중하여 그 중 어느 것도 제외하려고 들지 않는다.

정리하면, 성공회가 이성을 말할 때 성서나 전통과 분리해서 이해하지도 말고 더 우월한 것으로 이해하지도 말아야 한다. 다만 교회가(개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마음을 식별하려 할 때 성령과 은총의 도우심을 입어 성서와 전통을 해석하는 역할을 수행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기도와 예배라는 은총의 맥락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며 그 열매는 성서가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이주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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