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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10년 1월 31일 (연중 4주일 / 주의 봉헌) 강론초 (루가 4:21-30)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 29.


2010년 1월 31일 연중 4주일 성서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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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 1:4-10

4. 내가 받은 야훼의 말씀은 이러하였다. 5.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6. "아! 야훼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하고 내가 아뢰었더니, 7. 야훼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마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 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8.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9. 그러시고 야훼께서는 손을 내밀어 나의 입에 대시며 이르셨다 "나는 이렇게 나의 말을 너의 입에 담아준다. 10. 보아라! 나는 오늘 세계 만방을 너의 손에 맡긴다.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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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1:1-6

◯ 주여, 당신께 /피신/합니다.∥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말게/하소/서.

◯ 당신의 정의로 나를 보호하시고 /구해/주소서.∥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구해/주소/서.
◯ 이 몸 의지할 바위 되시고: 내 목숨 구원하는 /성채/되소서. ∥나의 바위, 나의 성채는 /당신/이십/니다.
◯ 나의 하느님, 악인의 손에서 나를 /구해/ 주시고, ∥ 흉악하고 포악한 자의 손에서 /나를/ 구하/소서.
◯ 주여, 바라느니 /당신/뿐이요 ∥어려서부터 믿느니, 주님 /당신/입니/다.
◯ 모태에서부터 나는 당신께 의지하였고: 어머니 뱃 속에 있을 때부터, 당신은 나의 /힘이/었으니,∥나는 언제나 당신을 /찬양/합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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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린 13:1-13

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2.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8.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9. 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10.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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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 4:21-30

21.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22.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
23. 예수께서는 "너희는 필경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어 나더러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에서도 해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 하시고는
24.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잘 들어라. 엘리야 시대에 삼 년 반 동안이나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고 온 나라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는 과부가 많았지만 26.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보내시지 않고 다만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에 사는 어떤 과부에게만 보내주셨다. 27.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환자가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 사람도 고쳐주시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만을 깨끗하게 고쳐주셨다."
28.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모두 화가 나서 29.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그 동네는 산 위에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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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의로우신 하느님, 마음이 깨끗하고 겸손한 이들을 축복하시고 세상의 지혜를 부끄럽게 하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더하시어 주님의 나라를 세상에 전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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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갈 길 (루가 4:21-30)

루가복음은 시종일관 예수님을 예언자의 풍모를 지니신 분으로 전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시며 당신께서 어떤 그리스도이신가를 암시하신 대목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전합니다. 사람들의 기대에 찬 시선은 금새 잔혹한 냉대와 박해의 눈초리로 바뀌게 됩니다. 놀랍게도 그리스도 취임사를 읽으신 그 날 이미 그리스도가 걸으시는 십자가의 길이 시작된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요? 당시의 욕심많고 어리석은 유대인들 때문에요? 아닙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도 여전히 비슷하게 가지고 있는 인간의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언자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예언자의 말마디는 우리 귀에 거슬리고 우리 양심을 찔러 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예언자의 정신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우리의 그리스도는 우리에 대해서는 너그럽고 우리의 적에 대해서는 냉혹한 해결사이면 충분합니다. 정직하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과연 예언자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가요?

예수님의 고향 사람인들 우리와 뭐가 달랐겠습니까? 동네에 한 청년이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시기 시작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난 것이고 촌구석에서 인물이 난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동네 “요셉의 아들”에 불과합니다. 그가 동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면 뭔가를 더 보여주어야 합니다. 당장은 아니래도 장차 뭔가를 보여주겠다고 뻥이라도 쳐야 합니다. 뭔가 기적에 가까운 일들을 보여주어야 “출세한 인간”으로 인정받습니다. 자기들과 비슷하게 살다가 갑자기 저 혼자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예언자를 자처하는 것은 정말 못마땅합니다. 예루살렘에서 학식과 명예와 인맥을 두루 갖추고 내려온 예언자라면 몰라도 자기들 가운데 갑자기 예언자라니 얼마나 불편합니까?

그럼 저 “요셉의 아들”은 과연 예언자의 상징인 엘리야와 엘리사가 보인 기적의 능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유대인들은 기적을 좋아합니다. 우리도 기적을 좋아합니다. 얼마나 편리하고 얼마나 효율적입니까? 광야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한 일은 경제적인 필요, 정치적인 권력, 종교적인 명예 등을 내용으로 하되 그것을 이루는 방법을 바로 기적적으로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지 말씀에 의지하여 이 유혹을 물리치시고 평범한 인간으로 남으셨습니다. 물론 믿음을 가지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문자적인 해석의 유혹도 거절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로서 시작하신 공생애! 예수님은 단순히 기적으로 하느님나라를 세우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주고 바라는 일을 이루어주는 힘, 그런 기적적인 능력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어찌 그리스도라고 자처할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근자에 우리도 가까이 경험하거니와 어떤 정치인이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이루고 싶다”고 나선다면 표를 많이 잃습니다. 온 산하를 파 뒤집어 엎어서라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장담해야 표를 많이 얻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도 뭔가를 보여주고 해결해주는 능력이 없다면 추종자를 얻기 어려운 것이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논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사람들이 듣기 거북해 할 말씀을 피하지 않고 하십니다. 엘리야, 엘리사가 기적의 능력을 행사한 것은 성경에 분명히 전해집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이 전하는 예언자들의 기적이란 일반적으로 일상적으로 모든 일을 기적적으로 해결하는 식의 그런 능력의 표시가 아닙니다. 믿음 있고 안면 있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시혜를 베풀어주는 일도 아닙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세상은 이른바 기적의 능력에 의지하여 운영되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적은 하느님의 임재,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기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중요합니다. 기적은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고 경험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이들이 표현하는 개념입니다.

하느님의 그 은총은 “선민”인 유대인과 “저주받은” 이방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를 미루어 표현하면 "신자"와 "비신자"를 가리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필요하고 구하는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집니다. 그 은총을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 사랑을 누리며 살고 그 사랑을 전하며 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실상 우리는 기적이 아니라 사랑의 힘으로 삽니다. 그것이 광야의 유혹에서 게쎄마니의 기도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 지키시고 가르치시고 살아내신 진실입니다.

자신만을 위한 기적을 구하는 자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고향사람” 예수를 끌어내 산 벼랑에서 밀어내려는 군중은 얼마나 잔인합니까? 평범한 인간들이 갑자기 잔인해지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의 욕망을 들킨데다가 종교적 위안이라는 거짓위로마저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바로 저를 포함한 세상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실은 매순간 “기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단순히 우리의 욕망을 이루어줄 비과학적인 사태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사 안에 매순간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며 은총을 베풀고 계심을 깨닫는 것, 또한 어느 누군가가 그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나누어 전해주는 이로서 택함을 받아서 귀한 사랑과 희생을 나에게 베풀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바로 “기적”의 체험입니다. 우리 교회와 신자들은 그 기적을 이적(異蹟)이라고 부르지 않고 성사(聖事, 싸그라멘트)라고 부릅니다. 우리 성공회가 우리 분당교회가 바로 이 성사의 깊은 의미를 바로 아는 교회인 것을 감사합니다.

“요셉의 아들”에서 시작하여“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되어가는 길, 그렇게 살아가는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은 기적적인 능력을 통해 만사를 해결해가는 길이 아닙니다. 성사적인 믿음을 통해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길, 그래서 모든 일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려는 삶이 바로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의 삶을 바울로 사도는 사랑의 송가로 노래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도 그 사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기쁜 소식, 곧 복음입니다. 그 사랑에 속하고 그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삶이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일입니다. 믿음도 소망도 바로 그 사랑을 향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연중4주일을 우리 교회는 아기 예수께서 성전에 바쳐진 일을 기념하는 주님의 봉헌주일로 지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감사하며 자신의 소유를 되돌려 봉헌합니다. 봉헌의 절정은 우리 자신의 삶을 산 제물로 드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우리의 봉헌은 무슨 뇌물청탁성이 아니고 인신공양성도 아닙니다. 우리의 봉헌은 우리의 삶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에 속하게 되었다는 표시이고 증거입니다. 아기 예수는 성전에 바쳐져 하느님의 사랑에 속하게 되었고 마침내 양초처럼 자신을 태워 빛을 뿜는 사랑의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에 속하게 된 우리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향한 사랑의 빛으로 타올라야 합니다. 오늘의 양초 축복식은 그 다짐을 되새기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신자인 우리에게 “너 믿음 덕분에 출세(出世)했냐? 그럼 기적적인 힘을 과시해봐라”요구합니다. 그래서 어떤 유능한 목사님은 3억원짜리 벤틀리 자가용을 타고, 어떤 훌륭한 교회는 2,000억원짜리 성전을 짓자는 식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러한 세상 사람들 사이 한 가운데를 의연히 지나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출세간(出世間)”의 길 그리고 다시금“출출세간(出出世間)”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비록 소박하고 가난한 모습일지라도 기쁘고 행복하게 그 소명의 길을 가는 저와 여러분이어야 함을 주님의 이름으로 격려하고 축복합니다. (2010.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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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으로 살아가는 의연한 삶
(루가 4:21-30)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박애(博愛)’, 즉 이타적이고 차별 없는 큰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그러한  사랑으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돌보신다는 것을 알려주셨고 우리도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격 자체가 그 사랑의 원천이고, 예수님의 삶 자체가 그 사랑의 완전한 실천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사랑의 사역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고향에서의 일화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신은 바울로 사도가 노래하는 “사랑의 송가(頌歌)”를 전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애욕(愛慾)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과 마음으로 대상을 대하는 일입니다. 대상에 몰두하고 그를 위해 무작정 희생하는 것은 지극한 사랑의 겉모습이지만 무엇보다 사랑에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영적 성숙”이라는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와 가슴을 열고 소통하는 풍성한 관계를 통해 서로의 아름다운 인간성을 꽃피우고 생명과 삶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바로 그런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아닙니까? 우리 만남에는 달콤한 연가(戀歌)와 대화도 있고, 예언자의 힘찬 선언(宣言)과 실천도 있어 좋습니다. 

 사랑은 우리 자신의 의지로 실천하라는 또 하나의 율법조항이 아닙니다. 사랑은 가장 큰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모든 재산을 내어주거나 남을 위해 불 속에 뛰어들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우리가 함께 있을 때 일어나는  신비의 상태입니다. 우리를 사로잡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자기애가 사라지고 지극한 행복감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정화되고, 하느님의 마음과 일치되어갑니다. 끝없이 욕망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바뀌고, 나를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생각이 없어집니다.

오늘 연중4주일을 우리 분당교회는 아기 예수께서 성전에 바쳐진 일을 기념하는 주님의 봉헌주일(2월 2일)을 옮겨 지킵니다.
신앙인은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깨닫고 그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소유를 되돌려 봉헌합니다.
봉헌의 절정은 우리 자신의 삶을 산 제물로 드리는 일입니다.
우리의 봉헌은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이므로 ‘사랑’으로 바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으로 바쳐진 인생은 세상에 빛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사랑을 모르는 어두운 세상에서는 오직 사랑으로 바쳐지고 사랑으로 살아가는 이만이 빛납니다.

예수께서 바로 양초처럼 자신을 태워 빛을 뿜는 사랑의 그리스도이셨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사랑의 빛으로 타올라야 할 존재입니다.
에워싼 사람들 사이를 지나 의연히 걸어가신 주님처럼 기쁘게 그 소명의 길을 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2007.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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