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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설날 별세기념 감사성찬례 설교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2. 1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설 아침입니다. 설날은 추석과 더불어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입니다.

우리의 명절은 대체로 조상 숭배와 효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추석은 햇곡식을 거두며 조상에게 감사하는 명절이고 설은 새해를 시작하며 조상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그리스도교 신자인 가족과 신자아닌 가족들이 함께 있으면 조상을 기념하는 제사문제를 두고 불편한 관계를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으로도 우리 전래의 명절을 참되게 기념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형식적으로 고착화된 유교식의 제사예절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조상을 참되게 기억하고 그들의 존재와 삶을 감사하고 조상을 위해 기도하며 바람직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차례의 제사를 대신하여 별세기념미사를 바쳐드립니다.

설날은 분명 일종의 성스러운 시간입니다.
시간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보통의 시간이 아니라 해가 바뀌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신령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통의 세속적인 인간관계를 넘어서서 유명을 달리한 조상을 기념하고 이웃의 어른들을 돌아보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설'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설이라는 말이 '한 살 나이를 더 먹는'에서의 '살'에서 왔다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곧 '살'이 '설'로 된 것인데 그 근거로 '머리(豆)'가 '마리'에서 왔다는 사실을 근거로 유추할 수 있음을 듭니다.

설날을 " 낯설다. "라는 말의 어근인 " 설 "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합니다. 그래서 설날은 " 새해에 대한 낯설음 " 이라는 의미와  "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 "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즉 설날은 묵은 해에서 분리되어 가는 전이 과정으로, 아직 완전히 새해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익숙하지 못한 그러한 단계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설날은 " 선날 " 즉 “장이 서다”라고 할 때의 그 개시라는 뜻의 " 선다 "라는 말에서 "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 " 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선날 "이 시간이 흐르면서 연음화 되어 설날로 와전되었다는 것입니다.

설날을 " 삼가다 " 또는 "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 " 섧다 "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합니다. 이는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신일이란 " 삼가고 조심하는 날 "이란 뜻인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간 질서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생긴 말입니다.

오늘 성경은 축복의 말씀과 희망의 말씀 그리고 겸허에 대한 말씀이 함께 선포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복을 비는 이들에게 반드시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려주실 수도 있고 아니 내려주실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려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같이 변덕스런 분이 아니라 신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믿음으로 새해를 맞습니다.

우리는 소망을 더욱 품고 새해를 맞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수고와 기도가 헛되고 소용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길게 좀더 넓게 보면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수고의 댓가를 거두고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는 결코 소망을 버리지 않는 예수님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씨뿌리는 농부는 더러 헛되이 수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낙심하지 않고 마침내 좋은 밭을 통해 풍성한 결실을 거두리라는 희망으로 일한다는 것입니다.

설날이 선날, 즉 개시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면 우리는 설날에 더욱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좀 더 겸허하게 살아야 합니다.
새해에 우리가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고 장담을 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헛된 장담이 얼마나 우습고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오늘 읽은 야고보서는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의 목숨 자체가 안개와 같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조마조마 불안하게 위축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겸허는 우리가 스스로를 두려움에 떨게하고 비굴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러한 위태위태한 삶 가운데서도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보장되는 것을 깊이 깨닫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설날이 삼가다는 의미에서 유래했다면 이는 우리에게 참으로 겸허하라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헛된 장담을 삼가야 하고 또한 습관적인 불평불만을 삼가야 합니다.

우리는 100%의 행복을 바랍니다. 불행은 0%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욕심일 뿐 참된 현실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49%의 불행과 51%의 행복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합니다.
단 2%의 차이를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단 2%의 행복입니다. 100%의 행복이 아닙니다.
2% 부족할 때! 라는 광고카피가 있습니다. 인간이 갈증을 느끼는 때가 우리 몸의 수분이 2%로 부족할 때라는 생리학의 사실에서 따온 광고입니다.
이제 2%가 부족하다는 광고를 들으며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이 2%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2%만 감사할 것으로 채워지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저울추는 행복으로 기웁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아기자기한 이 현실의 일입니다.
목숨 바쳐 사랑하는 드라마틱한 사랑도 실은 49%와 51%의 망설임 사이에서 일어난 결단입니다. 우리가 작은 일에 감사할 수 있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참으로 사랑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그렇게 살다가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위대하게 알려진 성인성녀가 아닐지 몰라도 그 분들은 모두 믿음으로 희망으로 그리고 작은 사랑으로 삶을 지탱하고 살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안에서 행복하기를 지금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또한 이제 우리 조상들의 영혼을 위하여 이 미사를 바쳐드립니다.

이 미사를 통하여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그들로 인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또 그들의 영혼이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 드립니다. 

교우 여러분의 올 한해가 참으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충만한 한해가 되시길 기원하며 별세한 교우들의 영혼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 평안히 쉬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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