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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10년 2월 14일 (연중6주일/설날) 강론초 (루가 6:17-26)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2. 12.



2010년 2월 14일 연중 6주일 / 설날 성서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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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 17:5-10

5. 야훼가 하는 말이다. 나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사람을 믿는 자들, 사람이 힘이 되어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
6. 벌판에 자라난 덤불과 같아, 좋은 일 하나 볼 수 없으리라. 소금쩍이 일어나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뙤약볕만이 내려 쬐는 사막에서 살리라.
7.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8.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개울가로 뿌리를 뻗어 아무리 볕이 따가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잎사귀는 무성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으리라.
9. 사람의 마음은 천길 물 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10. 이 야훼만은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본다. 그래서 누구나 그 행실을 따라 그 소행대로 갚아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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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

1.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따라 가지 않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않으|며 ∥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사-|람,
2 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3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으|니 ∥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맺으|리.
4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5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6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 의인의 길은 주께서 |보살|피신|다.
*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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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린 15:12-20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13.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셨을 리가 없고 14.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5.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는 우리는 결국 하느님을 거스르는 거짓 증인이 되는 셈입니다. 16.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17.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19.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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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 6:17-26

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 보니 거기에 많은 제자들과 함께 유다 각 지방과 예루살렘과 해안 지방인 띠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더러운 악령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그들도 고쳐주셨다. 19. 이렇게 예수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와 누구든지 다 낫는 것을 보고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예수를 만지려고 하였다.


20.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21.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25.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26.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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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정의의 하느님, 불의한 권세를 심판하시며 억울한 이들을 돌보아 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의로움을 분별하는 지혜와 실천하는 용기를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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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 사랑의 왕국에 참여하는 신앙 (루가 6:17-26)

오늘은 설날입니다. 음력으로 새해 첫날이지요.
교회력으로 이미 새해를 맞았고  양력으로 이미 2010년을 시작했는데 이제 음력으로 다시 경인년 새해를 맞이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 물리적인 시간으로는 오늘이 어제와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우리가 어떤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시간은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됩니다.

그 의미는 우리가 마음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선조들이 삶을 통해 경험해온 것들을 물려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오늘의 변화하는 삶의 상황을 통해 새롭게 경험하게 된 그 전통의 의미를 우리 후대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이 일이 우리가 명절을 지키는 이유입니다. 그저 형식만으로 지키는 명절은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것, 우리가 물려줄 것에 대한 내용을 깊이 살피고 누리는 명절이 되어야 합니다.

새해 첫 날을 따로 기념하는 것은 시간에 시작과 마지막의 질서를 매기는 노력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우리의 모든 시간과 공간에 질서가 지켜지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명절을 함께 지키며 우리는 마침내 우리에게 허락된 그 질서의 본성을 깨닫고 확인하고 기억하게 됩니다. 그 본성을 좀 어려운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우리 “삶의 관계성”과 우리 “존재의 전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실은 아직 정확히 이해하지를 못해서 공연히 어려운 표현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쉬운 말로 하면 우리 모두는 이런저런 관계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실은 각자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전체를 이미 전제로 하는 개체로서 전체를 이루며 어울어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어렵네요.^^)

사람들은 흔히 실존적인 가치를 좋아합니다. 나라고 하는 개체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라는 의미를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해석해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건 좀 단순하고 약간은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이해입니다. 실상 그런 해석은 우리가 머리로 지어낸 해석이고, 그저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바램에 가깝습니다.

엄밀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실상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어도 되는 존재입니다. 뭔가가 되려면, 뭔가로 인정받으려면 우리끼리 지어낸 구조와 합의에 의지해야 합니다. 이른바 “조직의 영광과 조직의 쓴 맛”을 인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른바 실존적인 가치란 그 속에서 되뇌이는 혼잣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실존적 중요성을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른바 우리의 실존적인 중요성은 십자가에 못으로 꽝꽝 박아버려야 함을 깨닫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의 존재란 참으로 별 볼 일 없고 우스운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제가 억지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일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무슨 영웅적인 위대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당대의 유대인들은 그처럼 무기력한 자칭 그리스도는 차라리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군인들과 군중들은 예수를 향해 “네가 십자가에서 내려온다면 당장 너를 그리스도로 믿어주겠다”고 빈정거리고 조롱합니다. 이 사태는 예수님이 당신의 능력을 감추고 무슨 "쇼"를 하고 계신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온전히 하느님을 의지하는 완전한 사람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실존을 포기했을 때,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다니!”,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는 시편 22편을 외치시며 운명하셨을 때 세상은 깊은 어둠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이른바 가장 거룩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를 율법적으로 나누는 상징이었던 성전휘장이 찢어졌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켜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착각이나 혼령이나 관념이나 이념이 아니고 단순히 육신의 눈으로 보는 목격담도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르던 이들이 그 스승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나 도리어 그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그 분을 우리의 참된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 곧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시는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셨다는 것을 성령을 통하여 깨닫게 된 사건입니다.

설날 감사성찬례에 너무 교리적인 설교로 딱딱하고 장황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너그러이 양해하십시오. 제 나이도 이제 살 날이 살아온 날보다 짧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분당교회에 올 때는 그래도 살 날이 살아온 날보다 많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더구나 앞으로는 여러분께 이런 말씀으로 설교를 드리는 시간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신앙생활은 여러분 개인이 복을 받아서 남보다 부귀와 명예와 건강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여러분 개인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을 통하여 이 세상이 모두 한 분 하느님 아버지의 관계성 안에, 삼위일체 하느님의 전체성 안에 사랑의 왕국이 되어야 함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 사랑의 왕국이어야만 비로소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 엄밀히 말하면 “한 영혼이 천하를 위해서 귀하다”는 것이 참으로 성립합니다.

세상의 왕국에서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우연히 태어나 우연히 죽어가는 존재, 이 세상에 애당초 없어도 되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존재,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나셨나요” 노래할 수 밖에 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오늘 복음서가 무엇을 기준으로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을 구분한다고 생각하세요?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음을 울며 믿음을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믿어지세요?
부요하고 배부르고 등 따습고 웃고 지내며 모든 이에게 부러움을 받는 이들이 정말 불행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신앙을 지키는 것일까요?

신앙의 목적을 한 개인이 잘 되는 일로 여긴다면 오늘 복음말씀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신앙의 목적은 하느님이 이루어가시는 사랑의 왕국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설 명절을 맞으며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 사랑의 왕국이 시작되기를 기도합시다. 나와 나를 분리시키고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는 일을 그치고 나와 내가 하나되어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공연히 남이 제시한 기준에 맞추어 나를 판단하고 자책하고 다른 이를 질투하고 미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과 집안이 하느님 사랑의 왕국으로 되어지기를 기도합시다. 한 몸, 한 핏줄로 행복하라고 한 가정, 한 집안을 이루어주셨는데 과연 무엇이 우리 가족들을 서로 불편하게 하고 갈등하게 하고 증오하게 하는지 살펴봅시다. 가진 것 없고 잘 난 것 없어도 사랑 하나로 서로 소중하고 모두 행복할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사회와 국가가 하느님 사랑의 왕국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시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이 자기들의 이해관계로 이합집산 집단을 이루어서 저마다 “정의”를 들이대며 실제로는 자기 잇속을 챙기는 일을 잘 살펴봅시다. 서로 돕고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행복한 세상을 만들라고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도록 해주셨는데 누가 과연 어떤 의도로 우리 욕심을 자극하고 우리 생각을 좌우하며 서로 갈등하고 다투게 하는지 차분히 살펴봅시다. 참된 행복은 욕망의 달성이 아니라 영적인 성장의 결과임을 기억합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고 있는지를 반성합시다.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인 것을 진실로 깨닫기를 기도합시다. 한 사람이 더 이상 실존적인 철인, 더 이상 사회적인 우상이 되려고 애쓰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이 세상을 위해 그저 소박하게 자기 정성을 다하여 일하고 주어지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물론 우리가 이런 기도를 참으로 드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가난하고 배고프고 눈물 흘리며 믿음을 지켜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합시다. 하지만 참으로 그런 삶이 행복하다는 것을 우리 서로의 눈빛과 잔잔한 웃음으로 나누고 확인하는 교회공동체가 되기를 노력합시다. 우리가 신자로 산다는 일이 단지 "자기 확신을 가진 한 개인"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교회공동체의 한 지체"로 사는 일임을 깨닫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우리 분당교회 공동체가 늘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를 힘쓰는 것을 감사하며, 앞으로도 계속될 교우 여러분의 복된 신앙생활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10.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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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이가 행복하다니, 과연 어째서 ? (루가 6:17-26)


오늘의 복음말씀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린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구요? 예수님 말씀이 아니라면, 아마도 제정신이 아닌 헛소리로 취급받을 듯합니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적어도 먹고 사는 걱정은 안하려고, 무엇보다 마음 평안히 살고자 우리는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 아닙니까?
아, 이렇게 되물으며 생각해보니 우선 무척 간단하고 분명한 해석이 가능하군요.
예수님은 지금 가난과 굶주림과 슬픔 그 자체를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약속을 주시며 그 약속을 신뢰하는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음지가 양지되듯, 쥐구멍에 볕들 날 있듯, 장차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를 부족함 없는 천당에 살게 하시고, 굶주린 이를 배불리시고, 우는 이들을 웃게 해주실 터이니 우리는 그 약속을 믿으며 지금 행복할 수 있는 것이지요. 아멘, 아멘! 우리 모든 그런 믿음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 너무 쉽고 평면적인 결론 같아 도리어 찜찜합니다.
부요한 이, 지금 배부른 이, 지금 웃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저주는 무슨 뜻일까요?
같은 이야기를 다른 표현으로 반복하는 유다인 특유의 화법이라고 하지만, 혹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없을까요?

이 세상의 가난함과 부요함, 굶주림과 배부름, 울음과 웃음은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도 세상 자체의 불의한 구조의 문제라고 보는 사회과학적 시각을 원용해 볼 수 있습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묵인하고 조장하는 세상의 악한 구조 속에서는 개인이 얼마나 근면하고 선량한가와는 별개로 현실에서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회적인 약자(또는 약소국)가 더 의(義)로운 쪽으로 볼 수 있고, 하느님께서도 에집트에서 노예로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시듯 그 사회적 약자들을 편들어주신다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것일까요?
“지금 가난하고 슬프고 억울한 처지에 있다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너희를 편들어 함께 하시니 사실은 너희가 행복한 것이다.” 글쎄요, 지나치게 정치적인 해석일까요?


여러분들은 어떤 해석이 마음에 와닿으십니까? 예수님은 무슨 뜻으로 말씀하셨고 루가를 비롯한 신자들은 어떤 의미로 알아들었을까요?

고통스럽지만, 기쁜 마음으로 한 가지 해석을 더 해봅니다.
하느님의 관심은 우리들의 가난이나 부귀 자체가 아니라 참된 “행복”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축복하시는 행복은 안주(安住)가 아니라 초월(超越)에 비결이 있습니다.
가난도 부귀도 그저 안주할 일이 아니라 초월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초월의 길을 보이고 알려주십니다. (2007.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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