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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10년 1월 24일 (연중3주일) 강론초 (루가 4:14-21)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 19.


2010년 1월 24일 연중 3주일 성서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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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 8:1-3, 5-6, 8-10
1. 이스라엘 백성은 각기 저희의 성읍에서 살고 있다가 칠월이 되자,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와서 선비 에즈라에게 청하였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려주신 모세의 법전을 가지고 오십시오." 2. 사제 에즈라는 그 법전을 가지고 회중 앞에 나타났다. 그 자리에는 남자와 여자,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말귀를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모두 모여 있었다. 때는 칠월 초하루였다.
3. 그는 수문 앞 광장에 나타나 해 뜰녘부터 해가 중천에 이르기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셈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들려주었고 온 백성은 그 법전을 귀담아들었다. 5. 에즈라가 모두 쳐다볼 수 있도록 높은 자리에서 책을 펴들자 온 백성은 일어섰다. 6. 에즈라가 높으신 하느님 야훼를 칭송하자 온 백성도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며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야훼를 예배하였다.
8. 에즈라는 백성들이 알아듣고 깨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법전을 읽으며 풀이하여 주었다. 9. 온 백성은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으면서 울었다. 그래서 총독 느헤미야와 선비요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일렀다. "이 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 바친 거룩한 날이니 울며 애통하지 마라." 10. 그리고 그는 이렇게 일러주었다. "가서 잔치를 차려 배불리 먹고 마셔라. 미처 마련하지 못한 사람이 있거든 그런 사람도 빼놓지 말고 몫몫이 보내주도록 하여라. 이 날은 우리 주님의 날로 거룩하게 지킬 날이니 슬퍼하지 마라. 야훼 앞에서 기뻐하면, 너희를 지켜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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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9
1.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줍니|다.
2.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줍니|다.
3. 그 이야기도 그 말|소리|도 ∥ 비록 들|리지|않아|도
4.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 온 세상 땅 끝까지 |번져|갑니|다.
5.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쳐 주시니: 마치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이 ∥ 신나게 치닫는 |용사|와 같|이,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 하늘 저 끝으로 돌|아가|고 ∥ 그 뜨거움을 벗어날 자 |없습|니-|다.
7.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사람에게 생기를 돌|려주|고 ∥ 주님의 법도는 변함없어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 준|다.
8. 주님의 분부는 그릇됨이 없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 주님의 법은 맑아서 사람의 눈을 |밝혀|준-|다.
9. 주님의 말씀은 순수하여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고 ∥ 주님의 법령은 참되어 옳지 않은 |것이|없-|다.
10. 금보다, 순금덩이보다 더 |좋-|고 ∥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욱|달-|다.
11. 당신 종이 그 말씀으로 깨우침 |받-|고 ∥ 그대로 살면 후한 상을 |받겠|거-|늘,
12. 뉘 있어 제 허물을 다 알|리이|까? ∥ 모르고 짓는 죄 일랑 말끔히 |씻어|주소|서.
13. 일부러 범죄할까, 이 몸 막아 |주시|고 ∥ 죄의 손아귀에 잡힐까, 날 |지켜|주소|서.
 그제야 이 몸은 대역죄 |씻-|고 ∥ 온전히 깨끗하게 |되리|이-|다.
14. 내 바위요, 내 구원자이신 |주-|여, ∥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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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린 12:12-31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13.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로 된 것이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15.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 하고 말한다 해서 발이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16.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 하고 말한다 해서 귀가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17. 만일 온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온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18.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지체를 우리의 몸에 두셨습니다. 19. 모든 지체가 다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몸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20. 그래서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는 것입니다. 21.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 하고 말할 수도 없고 머리가 발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 하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22. 그뿐만 아니라 몸 가운데서 다른 것들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23. 우리는 몸 가운데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부분을 더욱 조심스럽게 감싸고 또 보기 흉한 부분을 더 보기 좋게 꾸밉니다. 24. 그러나 보기 좋은 지체들에게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도 변변치 못한 부분을 더 귀중하게 여겨주셔서 몸의 조화를 이루게 해주셨습니다. 25. 이것은 몸 안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가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27.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 28. 하느님께서는 교회 안에 다음과 같은 직책을 두셨습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요 셋째는 가르치는 사람이요 다음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요 또 그 다음은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은 사람, 남을 도와주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 등입니다. 29. 모두가 다 사도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가르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30. 모두가 다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이상한 언어를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해석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31.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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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 4:14-21

14.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셨다. 예수의 소문은 그 곳 모든 지방에 두루 퍼졌다. 15. 예수께서는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셨다. 16.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17.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18.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19.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에게 되돌려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21.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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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크신 권능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어둠 속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이 은총의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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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총의 해”를 오늘 이 자리에서 (루가 4:14-21)

하느님의 은총으로 “죄를 용서받아”,“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을 구원이라고 보통 생각합니다. 교우님들도 분명히 그렇게 믿으세요?

우리나라의 어떤 유명한 목사님은 구원을 설명하기를 이른바 삼박자 축복 곧, 육신의 건강, 모든 일의 형통, 영혼의 천국입성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얻는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정말 솔깃한 이야기이지요. 이  삼박자 구원론에 감동한 신도들이 한 70만명 된답니다. 그들을 질투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그 자체로 별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성경말씀에 비추어 은총과 구원에 대한 우리 생각을 분명히 정리해보는 일은 중요합니다.

오늘 구약성경은 에즈라 선비가 모세의 법전을 가져와 읽으며 풀이해주자 온 백성이 그 법전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들으며 함께 울었다고 전합니다. 죄와 구원의 문제란 사후의 천국행 티켓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한 평생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상사를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서신성경에서 바울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죄와 구원은 한 개인 실존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은 개체나 실존이 기보다 인(人)과 인(人)의 사이(間)를 관계하는 존재입니다. 나와 나 자신, 나와 다른 이 사이에 세워진 오해와 미움과 차별과 억압의 장벽을 의식하고 깨닫고 성령의 도움으로 그것을 없애는 일이 은총이고 구원입니다.

루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가득히 받으시고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셨다고 전합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말씀으로 현존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은총의 해”입니다. “은총의 해”는 이스라엘 민족이 50년마다 시행했던 희년을 뜻합니다. 이 때 노예는 풀려나고, 집과 땅은 원 소유자에게 되돌려지고, 빚은 탕감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은 개인이 누리는 “삼박자 축복”의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깨닫고 누리는 “은총의 해”입니다.
“은총의 해”가 이루어지는 세상은 인간이 추구하고 이룩하는 유토피아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시작하셔서 마침내 완성하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바로 그 나라를 향한 것입니다.
굳게 신뢰하고 깊이 헌신하고 기쁨으로 인내하고 감사합시다.♱ (2010. 1.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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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는 그리스도 (루가 4:14-21)

위대한 인류의 참담한 불행은 왜일까요?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왜 이 세상에 죄악과 불행과 고통이 있는가”는 오래된 물음입니다. 진지한 휴머니스트는 그런 이유를 납득할 수 없어 신앙을 가질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요? ‘자비하신 하느님’이 아니라 ‘냉혹한 우리’가 인류의 행복과 불행에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안식일에 고향인 나자렛의 회당에서 성서를 낭독하십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사야서(61:1-2, 58:6)의 구절입니다. 그리고 선언하십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오늘의 본문은 이른바 “메시야(그리스도) 취임사”라고 불리는데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며 친히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하신 일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심, 은혜로우심을 알리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성공과 실패라는 우리의 흑백 논리로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논리는 자비와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36).
우리를 서로 갈라놓는 성공과 실패라는 기준을 고집하지 말고,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깨달아 함께 더불어 기쁘게 사랑하며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은혜로운 하느님보다 냉엄한 하느님을 상상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속마음은 ‘가난하고 묶이고 눈멀고 억눌린’ 실패자들이 냉정하게 도태되기를 원합니다. 그들의 인권을 인정하고 그들의 처지를 회복하는 일은 거저 되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양보와 희생이라는 댓가를 요구하기 때문이지요. 기득권을 가진 이들은 주님의 은혜로움을 약육강식의 엄연한 현실 질서를 위협하는 일로 여겨 싫어합니다. 어떤 이들은  ‘가진 이가 더 갖는 일을, 더 많은 자를 사로잡는 일을, 눈먼 이들을 이용해 더 이익을 얻고, 억눌린 이들을 더 억눌러서 자기의 편안을 챙기는 일을 하느님이 축복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류의 불행이 과연 누구의 탓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은혜로움을 거부하는 냉혹한 우리들 때문이 아닙니까?

이 모든 현실을 경험하며 우리는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머리를 굴려 계산하고 판단해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신앙도 교회도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깨닫고 그 자비하심을 삶으로 경험하고 실천하는 이들이 신자입니다.
방언과 황홀경이 성령받은 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는 인간, 곧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며, 하느님의 사랑 안에 서로를 사랑하는 인간이 바로 성령의 사람입니다. (2007. 1.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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