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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6월 14일 (연중 11주일) 강론초 (마르 4:26-34 자라나는 씨/겨자씨의 비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6. 14.


 2009년 6월 14일 연중 11주일 성서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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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 17:22-24
22 주 야훼가 말한다. 나도 그 송백 끝에 돋은 순을 따리라. 그 연한 가지에 돋은 햇순을 따서 높고 우뚝한 산 위에 몸소 심으리라. 23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그것을 심으면 햇가지가 나서 열매를 맺는 훌륭한 송백이 되고 온갖 새들이 거기에 깃들이며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일 것이다. 24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는 알리라. 높은 나무는 쓰러뜨리고 낮은 나무는 키워주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마른 나무는 다시 푸르게 하는 이가 바로 나 야훼임을 알리라. 나 야훼는 한번 말한 것은 반드시 그대로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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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린 5:6-17
6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러나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7 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8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든든하며 오히려 육체를 떠나서 주님과 함께 평안히 살기를 원합니다. 9 그러나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든지 떠나서 주님 곁에 가 있든지 오직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만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10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에는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우리를 사실대로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12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또다시 우리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주어 속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만 가지고 자랑하는 자들의 말을 반박할 수 있게 해주려는 것뿐입니다. 13 우리가 미쳤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미친 것이고 우리가 온전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온전한 것입니다. 14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토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리스도 한 분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15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죽으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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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4:26-34
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놓았다. 27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
3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31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32 심어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33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비유로써 말씀을 전하셨다. 34 그들에게는 이렇게 비유로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따로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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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지 않으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에게 성령을 내리시어 모든 일에서 우리 마음을 이끄시고 다스리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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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과 교회는 하느님나라의 씨앗 (마르 4:26-3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실 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정보로서의 가르침은 듣고 머리로 판단하고 기억하면 되는 문제입니다. 복음은 결코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가령 “하느님의 마지막 심판이 2009년 9월 9일에 일어나리니, 신실한 이들은 분당 불곡산 위에서 휴거되리라.”는 식의 정보가 구원의 메시지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런 식의 가르침은 우리의 영혼과 삶에 아무 연관도 없는 헛짓거리입니다.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런 정보를 신봉하는 것을 믿음으로 아는 일은 그냥 단순한 것이 아니라 악하도록 무지한 일입니다. 악은 그런 무지에 뿌리를 내리고 세력을 키워가기 때문입니다.

비유는 “알아들을 귀”가 있어야 알아듣습니다. 비유의 가르침은 듣는 이가 깨우치고 삶으로 수행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정보를 통해 알아내거나 들어갈 수 있는 어떤 기막힌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가 깨우침과 삶으로 이루어가야 할 구원의 상태입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는 말씀이 예수님 공생애의 시작입니다. 그 하느님나라를 가르치시며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를 “저절로 자라나 열매를 맺어가는 씨”에 비유하십니다.

씨앗은 큰 나무로부터 비롯해서 마침내 다시 그 큰 나무와 같아질 것이지만 실제는 싹이 트고 자라나는 과정을 필요로 하기에 둘은 엄연히 다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 씨앗의 비유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과 본성이 같은 분이시지만 분명히  이 세상에서는 자신을 낮추시어 완전한 사람의 아들로서 사셨습니다. 씨앗과 나무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는 일이 은밀하지만 분명하고 끊임없이 이루어지듯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일생을 이끄셨고 지금도 우리들을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어 가도록 이끄시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응애 하고 태어나는 육신의 모습이나 가능성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육신을 수련하여 무슨 불로장생의 신선이 되는 것이 인간의 목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은 영이신 하느님과 친교할 수 있는 영적인 요소가 인간에게 있다는 표현입니다. 영적인 인간으로서 영이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영이기에 영이신 하느님을 그렇게도 그리워하고 목말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스스로 영적 존재임을 깨닫는 계기를 일컬어 예수님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는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을 중심으로 한 옛 자아를 죽이고 성령을 담아낼 수 있는 영적인 자아로 새로워지는 것이 바로 구원사건입니다. 사춘기를 흔히 정신적인 제2의 탄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하여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2고린5:17)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골로3:10)”

이 일들을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에 하느님의 말씀이 씨앗으로 심기운 것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서신성경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따라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러분은 새로 난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썩어 없어질 씨앗에서 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앗 곧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났습니다.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베드로전 1:24)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된 것입니다.” (야고보 1:18)

말씀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 영혼은 이제 하느님 나라의 씨앗과 같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하느님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믿으십니까? 기쁨으로 확신하며 그 하느님나라를 누리고 계십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그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고 계십니까?

물론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번에 확실히 보여주는 기적적인 능력이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 나라의 표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얼마나 우리 자신에게 자주 깊이 실망하고 좌절합니까? 아니, 차라리 그것은 좋습니다. 때로는 아예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심겨 자라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기도 하지 않습니까? 분명 아직은 우리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의심과 두려움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우리에게 그 하느님 나라의 일이 맡겨졌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시어 이미 시작된 우리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필립 2:13)”

우리의 희망은 억지로 지어내는 거짓 희망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가 성령 안에서 자라고 자라서 마침내 온전히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입니다. 그것이 기쁜 소식, 곧 복음의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우리 안에 시작되어 이루어질 하느님의 나라는 일부 뉴에이지 신봉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신성(神聖)을 고양시켜 건강과 아울러 신적인 능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인격 안에 맺어지는 성령의 9가지 열매가 하느님 나라의 표지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차원이 남아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고립된 개체로서의 개인, 요즘 말로 개인주의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자는 당연히 교회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개인적 판단으로 신자가 되고 나중에 교회를 선택하여 나가서 예배를 드리거나 교제를 하는 요즘 식의 신자가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일 자체가 바로 신앙의 내용이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야말로 세상에 심겨진 하느님나라의 씨앗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시작된 작은 공동체, 그러나 그 교회야말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드러낼 가장 중요한 표지입니다. 겨자씨처럼 작디 작은 씨앗으로 심어졌지만 아무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싹을 티우고 자라고 자라나서 마침내 온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하느님의 백성이 될 때까지 복음을 전하고 드러내는 일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말씀과 성사는 바로 우리 안에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축하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영혼에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감사합니다. 우리들을 교회공동체로 불러 세우시고 하느님나라의 자라나는 씨앗이 되도록 사명을 맡기시고 축복하신 것을 기억하고 기뻐합니다. 그 “큰 나무 하느님나라”가 완성될 소망 안에서 오늘 우리는 “작은 씨앗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009.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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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 (마르 4:26-34)

신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낱말(키워드)는 무엇일까요? 예수님, 구원, 영원한 생명, 하느님나라... 이 보석 같은 말들은 서로 통하는, 사실은 같은 의미를 전해주는 말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하느님나라’라는 말을 제일 좋아합니다. 불교에서 빌린 ‘천당(天堂)’이라는 개념의 성경적인 본래말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의 핵심적인 내용이기도 합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는 말씀이 예수님 공생애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나라는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영지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그리는 완전한 저 세상도 아니고, 혁명가들이 꿈꾸는  정치적인 이상향도 아닙니다.

물론 그 나라는 한 분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절대의 세계이며, 하느님의 통치권은 우리네 삶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우리가 경험하는 하느님나라는 놀라울 정도로 소박한 내용을 갖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를 “저절로 자라나는 씨”에 비유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나라를 위해 신비한 지식을 알려고 여기저기 자칭 스승들을 쫓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이 땅에 하느님나라를 이루기 위해 정치적인 투쟁의 선봉에 서고 세상적인 술수를 동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가슴에 담아두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성경을 백독하고 성경구절을 줄줄 외우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단 한마디의 말씀이라도 그것을 진실로 우리의 깊은 마음에 간직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한 말씀에 하느님나라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여전히 급하고 둔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이었던 그들은 주님의 인내와 사랑을 통해 마침내 교회의 든든한 기둥들로 자라납니다.


작은 씨앗이라도 생명력이 살아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분당교회 설립 7주년이 지났고, 제가 섬긴지도 5년이 되어갑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저는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기다린 일밖에는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우리 교회가 이만큼 자라났을까 하는 자체가 신비롭고 감사한 일입니다. 주님의 비유 말씀대로 우리교회는 좋은 밭에 뿌려진 씨입니다. 겨자씨 같이 작지만 큰 가지를 드리울 씨앗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든든한 확신이요 소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이곳에서 하느님나라를 경험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2006.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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