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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6월 7일(성삼위일체주일) 강론초 (요한 3:1-17)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6. 3.


2009년 6월 7일 성삼위일체주일 성서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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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6:1-9
1 우찌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야훼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옷자락은 성소를 덮고 있었다. 2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이 그를 모시고 있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 훨훨 날아다녔다. 3 그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4 그 외침으로 문설주들이 흔들렸고 성전은 연기가 자욱하였다. 5 내가 부르짖었다. "큰일났구나. 2)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나는 아무 말도 못하게 되었다."라고 옮길 수도 있다. 6 그러자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뜨거운 돌을 불집게로 집어가지고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보아라, 이제 너의 입술에 이것이 닿았으니 너의 악은 가시고 너의 죄는 사라졌다."
8 그 때 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9    주께서 이르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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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8:12-17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과연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체에 빚을 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 의무는 없습니다.  13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14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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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3:1-17
1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2 어느 날 밤에 예수를 찾아와서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 그러자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두어라. 1)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이라고 옮길 수도 있다. 4 니고데모는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5 "정말 잘 들어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7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8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9 니고데모는 다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0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  11 정말 잘 들어두어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너희는 내가 이 세상 일을 말하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을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다.  14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17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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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찬송받으실 삼위일체 하느님, 주께서는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또한 모든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지극한 영광과 권능을 경배하며 찬양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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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난 사람으로 세상을 새롭게
(요한 3:1-17)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한 분이시라는 가르침입니다. 
“삼위일체”는 철학적 공론이 아닙니다. 처음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증언을 담아내려 했던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성경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삼위일체 신앙의 본질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을 아는 일은 원시인들이 천둥번개에 놀라 신을 찬양하는 그런 수준일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당시 랍비들이 성경풀이를 통해 “하느님에 관해서” 알려 주려 했다면,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는 당신의 앎을 삶으로 사심으로써 “하느님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일 역시 예수님에 관한 지적인 인식을 갖는 일이 아니라 그 분의 삶을 뒤따르며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참여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새로 나야, 위로부터 나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은 세례성사를 암시합니다.
이기적이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옛자아를 죽이고 성령의 마음과 관점과 소망을 가진 새자아로 새로 나는 일이 신자의 탄생입니다.
새로 나야 한다는 말씀은 얼핏 우리가 이 세상과 관계없이 우리 영혼구원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 저 세상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새로 나는 것, 곧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는 일은 “저 세상에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관심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이 땅을 살아가는 자, 다시 말하면 복음적인 가치로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변화시키고자 헌신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한 신자의 탄생, 교회의 시작이 인간적 지혜나 결심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으로 가능했다는 고백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이러한 구원의 이야기가 성삼위일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임이시라는 교리에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요한 3:16)
만일 하느님이 저 세상을 사랑하셔서 우리 영혼을 그리로 옮기는 일을 “영원한 생명”으로 보셨다면 성자 예수님도 협조자 성령님도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성자 예수를 통하여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령의 사람으로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살아가게 되는 일이 “영원한 생명”의 의미입니다.
“삼위일체”는 구원의 참뜻을 밝히는 귀한 믿음인 것입니다.
(2009.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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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삼위일체(聖三位一體), 하느님의  살아계심
(요한 3:1-17)

오늘 성삼위일체주일을 맞으며 그동안의 교회력을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던 대림절기,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기억하고 기뻐하는 성탄절, 그 주님의 공생애 구원사역을 기대하며 동참을 준비하는 사순절기, 그리고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 수난과 운명, 그리고 놀라운 반전인 부활주일, 그리고 이제 다시 하느님의 영으로서 하느님께 돌아가신 승천일,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협조자로 오신 주님의 영을 받는 성령강림주일을 기념한 신앙여정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제 새로운 대림절기까지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오늘이 성삼위일체주일로 지키는 까닭은 바로 그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자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유일하신 절대자이지만, 그것은 흔히 생각하듯 우리가 머리로써 철학적으로 추상한 하나님, 일자(一者)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모세의 하느님이요, 다윗의 하느님입니다. 인류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이시고, 역사를 이끄시는 하느님이요, 우리의 실존을 기억하시는 하느님이시고, 무엇보다도 오늘도 살아계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되 창조주이신 성부로, 구세주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협조자이시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성 삼위의 세 인격으로 경험한다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의 의미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좋은 머리로 알 수 있는 어떤  이론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삶을 통해 이 땅에서 체험하고 고백할 수 있는 하느님의 “현존” 자체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진리를 안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하여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영성(= 영적인 성격)을 깨닫는 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라 함은 바로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깨닫고 누릴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위(하늘)로부터 나야한다”,“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와 “창조(자유)와 사랑(나눔)과 도움(섬김)”의 관계를 맺어주시는 하느님을 경험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 신비는 어려운 이론이 아니라 삶의 기쁨이고 능력인 것입니다.(2006.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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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삼위일체(聖 三位一體),  하느님의  살아계심

“삼위일체” 교리는 옛날 그리이스의 철학개념을 빌어 표현되어있기 때문에 무척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려운 것은 어려운 대로 그냥 두어도 됩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 교리는 분명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것으로서 존중될 필요가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 위격이 어떻게 해서 한 본체일 수 있는가”등등을 이해해야만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교리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도리어 우리의 신앙이란 머리로 지어낸 관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목숨을 건 믿음의 삶 가운데 하느님을 실제로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되 세상을 창조하신 자비로운 성부 하느님, 이 땅에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바람과 숨결로 창조와 구원과 성화의 과정을 이끄시는 협조자 성령님, 이렇게 세 인격을 경험하는 풍성한 체험 가운데 살았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특별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하느님 존재에 대한 하늘의 비밀이론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삶을 통해 이 땅에서 체험하고 고백할 수 있는 “하느님의 살아계심” 자체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머리가 아니라 전 존재로 마주 대하고 체험하게 되면 우리가 놀랍게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을 체험하고도 우리의 인격과 심령에 아무런 변화도 없다면 그 체험은 틀림없이 가짜입니다. 우리의 변화는 우리가 작심하여 더 철저히 윤리적으로 살아간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모든 삶을 “하느님과의 하나됨”이라는 기준으로 새로이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변화를 “영으로 새로 태어남”이라고 복음서는 표현합니다.


이 삼위일체주일에 우리는 어떤 교리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느님을 드높이고 찬양합니다. 그 드높임과 찬양은 무슨 신학이론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거듭난 삶”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머리로 이해하고 주장할 수 있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아닙니다. “변화된” 우리들의 영혼과 삶과 실천이  삼위일체의 신비,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냅니다.(2003.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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