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설교

2009년 6월 21일 (연중 12주일) 강론초 (마르 4:35-41 풍랑을 잔잔케하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6. 16.


2009년 6월 21일 연중 12주일 성서말씀
-----------------------------------------
욥기 38:1-11

1 야훼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대답하셨다. 2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3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해 보아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렇게 세상물정을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5 누가 이 땅을 설계했느냐? 그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6 어디에 땅을 받치는 기둥이 박혀 있느냐? 그 누가 세상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7 그 때 새벽별들이 떨쳐 나와 노래를 부르고 모든 하늘의 천사들이 나와서 합창을 불렀는데, 8 바다가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 그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9 바다를 구름으로 싸고 먹구름으로 묶어둔 것은 바로 나였다. 10 바다가 넘지 못하도록 금 그어놓고 문에 빗장을 내려놓은 것은 바로 나였다. 11 그리고 나는 명령을 내렸다. "여기까지는 와도 좋지만 그 이상은 넘어오지 마라. 너의 도도한 물결은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
2고린 6:1-13

1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2 하느님께서는, "1)너에게 자비를 베풀 만한 때에 네 말을 들어주었고 너를 구원해야 할 날에 너를 도와주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이사 49:8. 3 우리가 하는 전도 사업이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4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일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과 궁핍과 역경도 잘 참아냈고 5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잘 겪어냈으며 심한 노동을 하고 잠을 못 자고 굶주리면서도 그 고통을 잘 견디어냈습니다. 6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과 꾸밈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를 들고 8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9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또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10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11 고린토의 교우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다 말하였고 내 마음은 여러분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12 여러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옹색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마음을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 13 나는 여러분을 내 자녀처럼 생각하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같이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
마르 4:35-41

35 그 날 저녁이 되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둔 채 예수께서 타고 계신 배를 저어 가자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다. 37 그런데 마침 거센 바람이 일더니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뱃고물을 베개삼아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않습니까?" 하고 부르짖었다. 39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하여 "고요하고 잠잠해져라!" 하고 호령하시자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아주 잔잔해졌다. 40 그렇게 하시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들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책망하셨다. 41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할까?"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은 우리를 온갖 유혹과 위험에서 보호하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에게 굳센 믿음을 주시어 모든 절망과 두려움에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도대체 이 분이 누구인데 (마르 4:35-41)

신앙생활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사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이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내가 중심이 되어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함께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문제는 그 많은 이들이 저마다 모두 자기자신을 제일 중요하게 여긴다는데서 생깁니다. 현실적인 해결책은 가장 무력과 지력이 강한 이들이 권력으로써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와 질서를 만드는 일입니다. 중요한 가치들의 서열을 만들고 동시에 사람들도 그 중요성에 따라 위계를 매깁니다. 제일 위에 있는 이들은 스스로 신을 자처하거나 신의 대리자로 처신하곤 합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은 “누가 나를 규정하는가” 의 문제와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우리를 규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사회, 곧 이 세상이 우리를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적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은 이 세상의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규정된 자의식(에고)을 벗어나 하늘로부터 거듭난 스스로의 새로운 자의식(셀프)을 갖는 일이 됩니다. 그것은 절대자 앞에 우리를 상대적인 존재로 세우는 일, 곧 회개로 시작됩니다. 하느님이라는 절대자 앞에서야 비로소 상대적인 나의 존재를 올바로 깨닫게 되므로 신앙은 곧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사는” 일입니다. 이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 와 권능 앞에서 평등하다는 깨우침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네 모든 것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바로 우리 신앙생활을 내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자가 절대자를 그냥 알 수가 없습니다. 제 멋대로 상상하고 지어내기 쉽습니다. 상대적인 존재의 욕망을 투사한 것은 우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라는 계시가 필요합니다. 완전한 하느님이시되 우리에게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인간으로서 상대적인 한계 속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통해서 절대자와 소통하고 일치하는 경지가 드러났습니다.

오늘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는 바로 그 경지를 보여줍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할까?” 절대의 하느님을 완전히 신뢰했던 예수님은 풍랑 속에서도 생사를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풀 한포기”도 하느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고 믿으셨던 예수님은 당신의 생사(生死)가 곧 당신의 사명(使命)과 하나임을 아셨습니다.
성부께 드린 성자의 그 “신뢰”를 보이시며 예수님은 고통과 죽음과 불행의 두려움에 떠는 우리에게도 그러한 “믿음”으로 의연히 살아가기를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2009. 6. 21)✠
===================================================================


                               왜 두려워합니까?
(마르 4:35-41)

두려움은 인간에게 가장 뿌리 깊은 원초적 본능입니다.
성경은 무수히 반복해서 우리에게 “두려워 하지마라!”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왜 두려움을 느낄까요? 그건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이고, 살아있음은 곧 죽음의 위협아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사실 조심성이기도 합니다. 무대뽀인 사람보다는 신중한 사람이 훨씬 사고 없이 오래 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두려움은 동물적 삶을 초월하는 인생의 의미차원에서 정신적 상실감, 영적인 허망함 등을 내용으로 포함하기 때문에 사실 두려움은 그냥 회피하려고 해서는 안되는 소중한 인간성의 일부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 자체를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정말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 대상의 정체를 분명히 아는 ‘지혜’를 길러야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두려움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위험한 상황이 일어났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이 상황이 해결되면 두려움이 가실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도제목은 대부분 우리의 위험한 상황을 해결해 주십사 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그것이 잘못된 태도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어떤 상황일지라도 의연할 수 있는 내적인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능력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전능하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통해 얻어집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뱃길입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풍랑’이 배를 위협하자 제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듭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평안의 경지를 나타내는 동시에 우리의 고통과 시련에 대한 하느님의 침묵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 부르짖자 예수님께서 바람과 물결을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의 믿음을 나무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항로에 위험이 닥칠 때 지혜를 잃고 허둥대지 말고,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기억하고, 주님께 부르짖으면 반드시 주님께서 건져주심을 경험한다는 것이며, 예수님은 그런 사랑과 능력의 주님이라는 내용입니다.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강조는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넘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 인생을 통하여 주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신뢰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위기는 뜻밖의 형태로 다시 올 수도 있으나 그럴지라도 우리 믿음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의연히 잘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6. 6. 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