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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5월 31일(성령강림주일) 강론초 (요한 15:26-27, 16:4-15)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5. 30.


2009년 5월 31일 성령강림주일 성서말씀 

사도 2:1-21
1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2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4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5 그 때 예루살렘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 6 그 소리가 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자기네 지방 말로 들리므로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7 그들은 놀라고 또 한편 신기하게 여기며 "지금 말하고 있는 저 사람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는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셈인가? 9 이 가운데는 바르티아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메소포타미아, 유다,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10 프리기아, 밤필리아, 이집트, 또 키레네에 가까운 리비야의 여러 지방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로마에서 나그네로 온 11 유다인들과 유다교에 개종한 이방인들이 있고 그레데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지금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들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저마다 자기네 말로 듣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하였다. 12 이렇게 모두 놀라고 어안이 벙벙하여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하며 웅성거렸는데 13 그 중에는 "저 사람들이 술에 취했군!" 하고 빈정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14 그 때 베드로가 다른 열 한 사도들과 함께 일어서서 군중을 보고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유다 동포와 예루살렘 시민 여러분,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15 지금 시각이 아침 아홉 시인데 어떻게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들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16 이것은 예언자 요엘이 예언한 대로 된 것입니다. 17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1)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너희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요엘 3:1-5) 18 그 때에는 나의 남종에게도 여종에게도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 19 나는 하늘 높은 곳에서 표징을 보이며 땅에서 기적을 행하리니 피와 불과 짙은 연기가 일고 20 해는 빛을 잃어 어두워지고 달은 피와 같이 붉어져 마침내 크고 영광스러운 주의 날이 오리라. 21 그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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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8:22-27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3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24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26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27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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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5:26-27, 16:4-15

26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27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4 그러한 때가 오면 내가 한 말을 기억하라고 너희에게 이렇게 미리 말해 두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이 말을 너희에게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5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간다. 그런데도 너희는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는커녕 6 오히려 내가 한 말 때문에 모두 슬픔에 잠겨 있다. 7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 8 그분이 오시면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9 그분은 나를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하실 것이며 10 내가 아버지께 돌아가고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를 나타내시는 것이라고 가르치실 것이고 11 이 세상의 권력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로써 정말 심판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실 것이다."
12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알려주실 것이다. 14 또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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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전능하신 하느님, 주께서는 성령을 보내시어 교회의 빛과 생명이 되게 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 마음을 성령의 한없는 은혜로 채우시고,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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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체험을 세상에 전하는 교회 (요한 15:26-27, 16:4-15)

지난 한 주간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국민장 기간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인이었고 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자살을 결심할 만큼 고통스러웠던 그 시간 속에서 그가 열심히 기도를 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고인에 대한 추모의 열기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연인이 파렴치한 범죄자로서 수사를 받다가 "쪽팔려서" 자살한 일에 어째서 그리 난리냐고 어이 없어 합니다.
기독교 주류는 그의 죽음에서 자살이라는 사태만을 관심합니다. 자살자는 영적인 범죄자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요, 공식적인 추모미사(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일입니다. 모든 교회가 함께 자축하는 교회의 생일입니다.
그런데 성령이란 도대체 누구입니까?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사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모든 일을 머리로 판단하곤 하는 저는 신앙생활을 해오는 동안 “성령”에 관하여 콤플렉스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 앞에 서면 상대적으로 성령이 부족한(?) 사제로서 이런저런 압박감을 받곤 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만큼 더 많은 생각과 공부와 경험을 하고자 애써왔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룹니다"는 고백을 저는 사랑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저와 다른 신앙의 양태를 비판하는 일이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서로 무슨 생각, 무슨 입장을 가지는 지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겉으로만 하나인 척 하는 것도 실은 한 몸을 이루는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불편한 논의일지 모르겠으나  저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핵심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오늘 들으신 성경말씀을 다시 묵상해보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성령, 교회가 경험하고 증언하는 성령체험은 “희망”과 “진리”의 영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은 단순히 초자연적인 능력의 영이 아닙니다. 드러나는 현상만으로는 성령과 악령을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요한 1서 4:1-6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자기가 성령을 받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다 믿지 말고 그들이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많은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알아 보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예수께서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적대자로부터 악령을 받은 것입니다. ... 그들은 이 세상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 세상 일을 말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읍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만 하느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진리의 성령과 사람을 속이는 악령을 가릴 수 있읍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느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기이한 언어로 말하고 장래 일어날 일을 알 수 있으며 병을 고치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성령의 은사(카리스마, 선물)을 받아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치유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깊이 깨우치고 그 일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신자를 교회에 가두어서 종교적인 일에 몰두하게 하시려고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이어가시려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성사를 통하여 성령을 받았습니다. 실상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성령체험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고백을 살고 증언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부활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육신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이야기를 하나로 꿰뚫어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악마의 세력을 꺽으시고 이루시려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각자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로서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의 이야기입니다. 죽음의 세력에 짓눌려 살아가던 이들이 하느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시는 나라에 관하여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악한 세력들의 거짓 속임수에 어떻게 진리의 말씀으로 맞설 수 있는가의 이야기입니다.

신앙인은 신앙의 가치, 신앙의 눈으로 모든 일을 분별합니다.
저는 오늘 이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자살은 죄”라는 주장을 들으며 낯이 뜨겁습니다.
당연히 자살은 옳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살의 문제는 생명이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명은 곧 인권의 문제입니다. 최근 인정된 존엄사의 문제도 생명의 고귀함, 인간의 존엄함을 어떻게 이해하고 지킬 것인가가 핵심입니다. 단순히 현상이 아니라 가치를 판단하는 문제입니다.
과연 그동안 한국교회가 이 땅의 생명과 인권에 대해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였을까요? 저 자신부터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어떤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을까요?

어느 위대한 목사님은 노무현 전대통령의 소식을 듣고 “청소년들의 모방자살이 걱정이다.  능력이 없으면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 하는데...” 하고 걱정하셨다고 합니다.
당연히 자살은 바람직하지 않고, 모방해서도 아니 될 일이지요. 그런데 신앙의 지도자라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해주어야 합니다. 신앙이 깊지 않은 고인도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이다”고 유서에 남겼는데... 
실상 신앙의 본질은 삶과 죽음을 같은 차원의 일로 보는 일입니다. 씁슬한 마음으로 억지로 예를 만들자면 노무현의 영향을 받아 자살하려는 학생에는 “노무현처럼 일생을 치열하게 살아서 노무현처럼 대의를 위해 큰 일을 도모한 후에” 하라고 권유하면 될 일이니 그다지 걱정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도리어 수단방법 안가리고 이기적으로 살아서 전과 몇 범이 되더라도 세상은 그저 성공한 사람을 제일로 알아준다고 가르치는 것보다 나은 일이 아닐까요?

이야기가 유치해진 김에 죄송하지만 고전유머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유람선이 침몰했습니다. 구명보트에 구조된 사람들은 전부 13명이었는데, 정원은 10명,  3명이 물속으로 뛰어내리지 않는다면 모두 다 죽을 판입니다. 그러자 그중 한사람이 일어나 외칩니다. "대영제국 만세!!" 그리곤 그 영국인은 물속으로 뛰어내립니다. 그걸 보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진 프랑스인이 "질 수 없다!!"하며 자신도 뛰어내립니다. 나머지 한 명이 문제입니다. 긴장된 순간에 갑자기 두루마기를 입은 한 사내가 일어나서 "대한민국 만세!"를 크게 외칩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일본인을 발로 차서 물 속에 밀어넣습니다. 영국인의 자살은 용서받지 못할 자살입니까? 기지를 발휘한 한국인은 천당에 가게 됩니까? 유치한 이야기에 유치한 질문을 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가 자살자의 구원문제를 다루는 수준이 이런 유머수준인 것처럼 세상에 보여져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참다운 성령체험이 필요합니다.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정서적으로 느끼는 고양감이 성령체험이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깊이 되새기는 일이 성령체험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성체성사가 가장 높고 깊고 생생한 성령체험입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시려고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 분의 생명을 먹고 마시며 우리가 참 생명이 되는 일입니다. 그 분이 목숨 바쳐 사랑한 그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욕심과 어리석음으로 죽음과 미움에 사로잡혀 있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희생할 용기와 지혜로 살아가는 일, 그것이 성령체험입니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유스토”(의인義人이라는 뜻)라는 신명으로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실제 종교인으로서는 “냉담자”였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그 냉담의 책임이 어쩌면 교회 안에서, 교회만의 기준으로 구원을 관심하며, 정작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시려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그리스도는 외면해버리는 교회에게 더 많이 있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노무현 전대통령을 향한 추모열기는 실은 정치적인 확신이나 선호라기보다는 “가치”를 추구하는 삶, 이 황폐한 땅에서 참된 삶을 살고 가르치는 “어른”을 모시고 싶은 이들의 갈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제가 정말 두려워 하는 것은 그 수많은 추모객에게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교가 아무런 “가치”도 제시해주지 못하는 이기적인 종교집단으로만 여겨지는 일입니다.

2000년전 오순절의 성령 강림의 체험을 두고 그 현상 만을 신기하게 본 사람들이 “술에 취해 그런다”고 빈정거리자 베드로는 성경을 인용하여 말씀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너희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요엘 3:1-5) 그 때에는 나의 남종에게도 여종에게도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 나는 하늘 높은 곳에서 표징을 보이며 땅에서 기적을 행하리니 피와 불과 짙은 연기가 일고 해는 빛을 잃어 어두워지고 달은 피와 같이 붉어져 마침내 크고 영광스러운 주의 날이 오리라. 그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와 우리 모두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노래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나라의 참된 희망을 선포해야 합니다.
설사 말로 그친다 해도 “아파트 값이 올라서 돈 많이 버는 세상이 와야 한다”고 노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설사 말로 그친다 해도 “사람 사는 아름다운 세상, 하느님이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평화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우리 자신의 구원을 진실로 진실로 확신하려면 우리의 소원이 참된 희망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 우리의 욕망, 우리의 추구가 아니라 성령의 간구, 성령의 능력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009.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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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께서 이끄시는 신앙생활
(요한 15:26-27, 16:4-15)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참 신비합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 중심으로, 어떤 이는 가슴 중심으로, 또 어떤 이는 이른바 뱃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에니어그램의 설명)을 배운 뒤로 나와 스타일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훨씬 편해졌습니다.

저는 전형적인 ‘머리형’인데 삶속에서 경험하는 사건이나 관계를  거의 본능적으로 ‘지적인 내용’으로 바꾸어서 파악하고 대처하는 경향입니다. 오랜 동안 신앙생활도 그렇게 해왔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이런 저런 철학적, 경험적 지식들이 머리에 잘 정리되는 만큼 내 신심이 돈독해지는 줄 알았죠. 성격이나 행실에 대해 그다지 나쁜 평이 없었던 것도 제가 믿음이 좋은 때문인 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저 소심하고 착한 편인 성격이  사람들의 무난한 평판을 받은 것뿐이고, 제 머리 속의 신(神)인식이란 제 삶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제 안의 욕심과 어리석음과 분노가  들끓어 오르는데, 제 머리 속 지식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함을 깨달으며 저는 내면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고통스런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그리고 나서야 신앙생활이란 살아계신 하느님과 저의 인격적인 관계가 속알맹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서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사는 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라고 가르칩니다.  그 관계란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과 요청으로 시작되고 우리의 응답과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관계가 우리의 막연한 관념으로 우리 머리 속에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성령님, 협조자이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나의 삶을 통하여 맺어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적’인 이해를 중시하던 저의 경우와는 달리 어떤 분은 자신의 ‘감정적’인 느낌을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삼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분은 자신의 ‘의지’가 관철되는 정도를 신앙생활의 보람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와 본질적인 차이는 아닙니다. 우리의 지성, 감성, 의지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팍팍하고 고단하며 열매 없는 삶을 살게 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성, 감성, 의지는 살아계신 성령께 맡겨져야 합니다. 우리가 특정한 신념이나 지식을 고집하지 않을수록, 우리가 맛보고 싶은 감정적 흥분을 포기할수록, 모든 것을 내 욕심대로 하고픈 마음을 내려놓을수록 성령께서 하늘의 지혜와 평안과 형통함으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2006.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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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여기 살아계신 진리의 영


우리의 경험은 “말”과 “글자”를 통해 표현됨으로써 오래 기억되고 다른 이와 다음 세대로 전해질 수 있습니다. 말과 글의 힘은 위대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삶의 질이 더 나아지는 것을 “문화(文化)”라고 표현하며 펜의 힘이 칼보다도 강하다고 합니다. 글월(文)로 표현되는 진리가 우리 삶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굳어진 글자, 절대화된 말이 얼마나 사람들을 괴롭히고 진리를 억압하는지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동서양의 모든 깨달은 사람들은 진리란 언어를 초월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말로 표현되는 도는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는 도가의 선언과, “문자로 깨달음을 표현하지 않는다(言語道斷, 不立文字)”는 선가의 선언은 서로 통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것이 기록된 성경을 지극히 귀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머무는 말씀이 아니라 육신을 취하여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의 진리를 통해 하느님께서 문자나 교리에 얽매인 하느님이 아니라 언제나 모든 말씀의 주인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은 우리가 문자에 얽매이지 않도록 자유롭게 해주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모든 문자와 전통은 성령의 비추심을 통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바울로 사도가 표현하듯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우리는 문자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깨닫습니다.
과거 속의 예수님을 붙잡고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신앙체험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살아계시는 예수님, 우리의 경험 속에 새롭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살아갑니다.

성령은 추상적인 어떤 원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을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뜨겁고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시는 살아계신 우리의 협조자이십니다.
교회의 시작과 현재와 미래도, 우리의 믿음의 시작과 열매도, 우리의 내면적인 평화와 외면적인 실천도 모두 성령님께 달려있습니다.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은 강림하셔서 지금 우리의 영과 삶과 우리 교회와 이 세계를 움직여가고 계십니다! (2003.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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