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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1월 11일 (주의 세례주일/연중1주일) 강론초 (마르1:4-11)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 6.

2009년 1월 11일 주의세례주일(연중1주일) 성서말씀

창세 1:1-5

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2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3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4 그 빛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5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첫날이 밤, 낮 하루가 지났다. 

시편 29

1 하느님을 모시는 자들아, 주님께 돌려 |드려|라. ∥ 영광과 권능을 주님께 |돌려|드려|라.
2 그 이름이 지니는 영광 주님께 돌려 |드려|라. ∥ 거룩한 빛 두르신 주님께 머리를 |조아|려-|라.
3 주님의 목소리가 바다 위에 울려 |퍼진|다. ∥ 영광의 하느님께서 천둥소리로 |말씀|하신|다.
4 주께서 바닷물 위에 나타나신다. 그 목소리는 힘|차시|고 ∥ 그 목소리는 |장엄|하시|다.
5 주님의 목소리에 송백이 쩌개|지-|고 ∥ 레바논의 송백이 |갈라|진-|다.
6 레바논 산이 송아지처럼 |뛰-|고 ∥ 시룐 산이 들 송아지처럼 |뛰게|하신|다.
7, 8 주님의 목소리에 불꽃이 튕기고, 광야가 흔들|거린|다. ∥ 주 앞에서 카데스 광야가 |흔들|린-|다.
9 주님의 목소리에, 상수리나무들이 뒤|틀리|고 ∥ 숲들은 벌거숭|이가| 된-|다.
 모두 주님의 성전에 |모-|여 ∥ 한결같이 그 영|광을| 기린|다.
10 주께서 거센 물결 위에 옥좌를 잡|으시|고 ∥ 영원히 왕위를 |차지|하셨|다.
11 주님의 백성들아, 그에게서 새 힘을 |얻-|고 ∥ 복을 받아 평화를 |누리|어-|라.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사도 19:1-7

1 아폴로가 고린토에 머물러 있는 동안 바울로는 북부 지방을 거쳐 에페소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몇몇 신도들을 만나 2 "당신들이 신도가 되었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조차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 바울로가 "그러면 당신들은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 하고 다시 묻자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4 이 때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한 표시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분 곧 예수를 믿으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5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6 바울로가 그들에게 손을 얹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셨다. 그러자 그들은 이상한 언어로 말을 하고 예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7 이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마르 1:4-11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하고 선포하였다.
5 그 때 온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 와서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
7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9 그 무렵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으셨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에게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1 그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1과 2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1) 영원하신 하느님, 예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을 보내시고 사랑하는 아들이라 말씀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우리도 세례의 언약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2) 사랑의 하느님, 의로우신 성자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어 우리 죄인들과 같이 세례를 받으셨나이다. 비옵나니,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다시 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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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성사 -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는 사건 (마르 1:4-11) 

우리는 세례성사를 주님께서 직접 세우신 성사로 공경하거니와 복음서에서 바로 이 장면, 몸소 세례를 받으시는 일과 마지막에 승천을 앞두신 주님께서 “땅 끝까지 하느님나라를 전하여 모든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당신의 명령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당부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일은 원죄를 씻어 마음의 평안을 누리며 천국에 갈 자격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요한의 세례는 물론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회개의 표시입니다. 하지만 신앙적인 의미로서의 회개는 단순히 우리 의지를 굳건히 하여 바른생활 사나이가 되어보겠다는 식의 그런 결심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대개 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나기 일쑤입니다.

회개는 사실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는 일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우리의 삶이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차원을 얻는 일입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며 예수님은 한 차원을 더 깊은 의미를 더하신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고 징벌을 피하려는 동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의 담지자가 되는 화해가 세례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고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소리가 들려왔다고 전합니다.

신앙생활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와 관계된 사람의 좋은 변화를 위해서 기를 쓰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깨닫게 되는 마지막 결론은 참으로 깊은 차원의 자각이 아니면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리의 세례는 바로 가장 깊은 차원의 자각을 통한 변화의 사건입니다.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우리 삶의 방향을 바로잡게 합니다. 예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우리에게 참다운 인간의 삶을 보장합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시는 하느님의 기쁜 음성을 듣습니다. 모두들 참으로 들으셨지요?^^

교회력은 예수님의 일생을 따라가며 우리 자신의 변화와 성숙을 이루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의 세례는 우리가 받은 세례의 모본입니다. 그것은 소명으로 새로워지는 삶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200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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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이기고 새로워진 인생 - 세례와 성령과 소명(마르 1:4-11) 

따지자면 오늘 해가 달리 새로울 리 없지만, 우리 마음이 새로움을 갈망하기에 우리는 새해 새아침을 설레임으로 맞습니다.
새로움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지금처럼 광원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에 칠흑 같은 어두움을 몰아내며 떠오르는 새벽햇살의 새로움은 정말 감격스런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그런 햇살이, 빛이 비추어지는 사건이 바로 “세례성사”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얼핏,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실 터인데 왜 회개의 표시인 세례를 받으셨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살펴보면 세례의 참뜻은 단순히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소명을 받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는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뜻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하느님중심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세례의 외적으로 보여지는 증표는 “물”이지만, 내적이고 볼 수 없는 증표는 바로 성령님의 임재입니다.

성령은 창조의 영, 생명의 영이시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협조자이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성령의 생명을 얻어, 성부의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공동체인 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죄는 어둠입니다. 죄는 무지이고 탐욕이고 두려움입니다.
자기에 갇힌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인생의 의미를 모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죄에서 벗어나 빛이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세례를 받은 이후로 우리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의 본질을 깨닫고 용서를 체험합니다. 죄 짓고 벌 받는 것이 무서워 움츠리거나,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참된 인생을 살지 못합니다.
죄는 우리의 이런저런 실수 자체가 아니라, 도리어 그런 실수를 핑계 삼아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태도입니다.
죄에 민감하고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는 것은 복된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죄보다 주님의 사랑과 용서가 크심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의롭고자 기진맥진하거나, 죄책감으로 자포자기하는 인생은 어리석습니다. 죄를 통해서 자기의 본성과 세계의 실상을 깨닫고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믿음의 역설이 바로 “은총”이요 “복음”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고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소리가 들려왔다고 전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느님의 음성이 울릴 때까지 우리는 매일매일 세례의 삶을 살아야합니다.(20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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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이 받으신 세례, 주님이 베푸시는 세례 

새해를 맞으며 다진 우리의 결심은 곧잘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굳은 의지로 올바른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시고 그 여부를 윤리적으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의 연약함과 죄성을 깊이 아시고 우리에게 은총과 자비로 ‘사랑의 구원’을 베푸시고 새 삶의 길을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세례는 본래 죄를 씻는 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이 세례 예식을 통하여 “죄로부터 돌이키는” 윤리적 결단을 요구했습니다.
세례의 의식이란 단순히 죄의식을 덜어주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이제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향하여 새로운 삶의 자세를 가지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무슨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주님의 앞길을 닦으러 와서 “하느님나라가 다가왔음”을 선포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요한의 가르침이 옳다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라는 세례 요한과 통하는 가르침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 그 하느님의 나라가 이제 바로 예수님을 통하여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현존으로 오늘도 이어지며 마침내 다시 오실 예수님의 통치로 완성되리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는 요한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이제 새로운 세례를 베푸십니다.

예수님이 베푸시는 세례는 ‘죄의 씻음’을 물론 포함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180도의 방향전환, 곧 ‘회개’를 또한 포함합니다.
또한 이제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가 더해집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하면 우리의 옛 자아가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물에 잠기는 세례 때에 우리의 옛자아는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바울로는 표현합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제 새로운 부활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 받은 우리에게 주님은 구원의 확증으로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우리는 자기의 의지와 노력으로 죄를 피하고 의로운 삶을 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새로운 자아인 우리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내가 욕망하는 재물과 권력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초대받은 하느님나라를 위하여, 그 하느님나라를 이루는 일들을 위하여 기쁘고 보람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2003.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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