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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6월 29일 (연중13주일) 강론초 (마태 10:40-42 맞아들이는 사람이 받는 상)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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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0:40-42

40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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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마태 10:40-42)

부모가 자식의 믿음을 골라 줄 수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의 믿음을 대신 가져 줄 수 없습니다. 각자의 인생이 각자의 인생이듯 우리의 믿음은 각자의 믿음입니다. 나의 믿음을 다른 이에게 강요할 수도 없고 다른 이의 믿음을 억지로 따라 갈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다른 믿음을 선택하게 되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믿음의 인생의 악세사리가 아니라 본질입니다.

인생을 사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런 믿음이 없는 사람도 실은 그 믿음 없음을 자신의 인생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실 가끔 저는 그런 믿음 없는 이들이 신기하고 존경스럽습니다.
절대에 대한 믿음이 없이도 과연 삶의 내용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저리도 태평하게 유한한 인생을 살아갈까? 무엇이 그들이 죽음 앞에서 후회없는 인생으로 평화롭도록 보장할까?
그들은 자신의 믿음 대신 세상의 평판이나 주장에 관심을 두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물론 믿음이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선전합니다.
많이 소유하고 많이 소비하면 행복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을 무시하거나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저는 내심 그들의 행복을 질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피며 겸허히 물어봅니다.
 “나는 저 믿음없이 사는 이들보다 정말 더 인생을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신앙생활의 기쁨으로, 자랑으로 내세울수 있을까?”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복을 받아서 재물을 모으고 명예를 얻는데 성공했다고 하면 합당한 자랑일까요? 제가 그렇다는 얘기가 당연히 아니라^^ 그런 내용이 과연 믿음의 자랑일 수 있을까요?
믿음을 통해서 나는 교회공동체 안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다고 내세울까요? 이 역시 제가 남 다른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과연 그런 다소 고상한 보상이 믿음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나의 믿음을 통해 나는 죽은 후에 천당에 가게 된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면 떳떳한 믿음의 자랑일까요? 과연 참으로 그러한 것일까요?

우리가 콤플렉스 없이 말할 수 있을까요?
 “나는 참 보잘 것 없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감사와 평화로운 마음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신뢰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진리로 나를 가르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나를 돌보십니다.
나는 절대자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요 그 분 나라의 시민입니다.
신의 뜻 안에 이 세상이 자연스레 존재하듯 나는 신의 사랑 안에 이미 충분합니다.
나의 죄와 죽음은 하느님의 용서와 용납으로 늘 깊고 새로운 사랑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당신께서도 마찬가지 아니세요? 우리는 신의 사랑안에 하나입니다.” ✠(2008.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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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람 

예전에 한때 저는 신앙생활을 “신에 관한 설명을 머리로 잘 이해하여 깨우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리를 따지기 좋아하고, 머리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자부했기에 신학지식을 아는 그만큼 훌륭한 신앙인이 된 것처럼 꽤 오래 동안 스스로의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다행히 그 착각은 깨지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또 한동안은 신앙생활을 “신비하고 신령한” 그 무엇을 누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성령세미나등을 통해서 방언을 하고, 은사를 받고, 악령도 분별하고, 기도 응답도 즉시즉시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좀 더 지내보니 우리의 삶은 그러한 신령한 체험의 연속이기는 어렵고, 설사 그런 체험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그 체험이 외면적으로 가져다주는 삶의 조건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깊은 곳에서 시작되는 인격의 변화, 삶의 방향과 생활태도의 변화가 신앙생활의 목적이라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자연히 신령한 체험을 중시하는 분들을 대하면서도 이제는 그 분들의 체험 자체 보다는 그 체험이후 그의 인격과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동안의 교리공부, 신비체험, 사목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이제 신앙생활에 대하여 다시 생각한다면 “하느님을 내 삶에 받아들여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살아가는 일”이라고 정리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우리 삶에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지적인 받아들임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받아들임은 우리의 가슴을 여는 일로 이어집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자신을 낮추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 하느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울림을 우리 가슴으로 받으면 우리 마음도 깊은 울음을 울게 됩니다. 주님의 보배로운 피는 이천년전 십자가에서 방울져 흘러내려 지금 우리의 성배에 떨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그것을 한 마음으로 마시지 않습니까? 그것은 완전한 사랑으로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를 움직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느님을 받아들임은 그 어떤 닫힘도 없이 우리의 존재를 활짝 여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를 우리의 삶에 받아들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온갖 희노애락, 아픔과 고통을 주님이 함께 하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어떤 처지에 있든지 자기 자신을 귀하게 받아들입니다. 서로서로를 주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존경하며 받아들이고, 나아가 이 세상에서 낙오하고 패배한 이들조차 우리의 삶 가운데 더불어 사는 이들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을 이렇게 맞아들인 이들이 “가장 보잘 것 없으나” 바로 주님의 사람인 우리들입니다.(2005.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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