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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6월 15일 (연중11주일) 강론초 (마태9:35-10:8 열두제자의 파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6. 12.

마태 9:35-10:8

35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시는 곳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36 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37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38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

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비롯하여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와 세리였던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가나안 사람 시몬, 그리고 예수를 팔아 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이다.

5 예수께서 이 열두 사람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마라. 6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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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을 제어하는 복음의 능력 (마태9:35-10:8)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부와 권력과 지식을 힘으로 가질 수 있는 이들은 대체로 세상의 경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것들을 당연시하고 고통 가득한 현실을 자연스런 질서라고 합리화합니다. 본래 세상살이가 그러한 것이라고, 나아가 세상의 경쟁에서 성공한 이들은 하느님께 복을 받은 것이고 패배한 이들은 벌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가난하고 무지한 밑바닥 사람들에게 인생과 세상과 하느님은 대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복음은 바로 그런 세상에서 그렇게 상처입은 사람들을 향하여 전해진 하느님의 크신 사랑, 깊은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저 좋은 게 좋은 거고, 무조건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이라는 식의 흥얼거림이 아니라 참혹한 인간세상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깊은 신음이 복음의 소리로 들려져야 하지 않을까요?

복음은 하느님의 사랑이 만사를 다 해결할 것이라는 단순한 희망과 위안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선포하시며 동시에 그 표징으로 병자를 고치시고 악령을 쫓아내십니다. 예수님은 불의와 불행, 고통과 원망, 병과 허물로 목자 없는 양들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사람들을 불쌍히 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짓누르고 속이는 악한 권세, 악한 영들을 꾸짖고 쫓아내십니다.

악령은 머리에 뿔 달린 기괴한 존재일까요? 아닙니다.
 “인생을 살고 세상을 경험해보니, (과연 얼마나 살았고 얼마나 경험했을까요?^^) 도저히 이 땅 위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불가능하다”고 간주하는 우리들의 무의식 위에 군림하는 세상의 지배체제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일은 어리석고 헛되다고 하는 세상의 주장입니다.
세상의 악령은 ‘하느님의 나라’를 질투하며 이 합리적 세계에 ‘하느님의 나라’는 부당하고 불온한 운동일 뿐이라고 두려움에 차서 소리칩니다.

우리는 은연중 세상의 힘과 악령의 권세를 두려워합니다. 악한 현실을 대면하고도 우리에게 “악령을 제어하는 권능”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 세상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세상을 향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신앙은 저 세상을 동경하여 이 세상을 등지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지배체제와 그 논리에 대하여 ‘말씀의 진리’와 ‘성사의 사랑’으로 악령의 정체와 속임수를 폭로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악령을 제어하는 권능”을 우리는 슬기롭고 용기있게 행사하고 있는 것인가요? 우리의 평화는 참으로 그 권능에 힘입고 있는 것일까요? (2008년 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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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실천하는 교회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이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해 분부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오늘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치유와 생명과 회복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바로 그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기독교가 세상을 정죄하고 저주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신자들 편에서 이를테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를 ‘예수를 받들어 섬기지 않으면 지옥에 보내버린다’는 위협처럼 느껴지도록 전한다면 이는 대단히 잘못된 일입니다.
예수님은 섬김 받기를 원하시거나 사람들에게 지옥징벌 내리시기를 즐기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스스로를 낮추시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하신 겸손과 사랑의 화신이 아니십니까?
그러므로 그 구호의 본래 바른 의미는 ‘예수님은 하늘나라(천국)를 이 땅에 이루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그 사랑의 나라를 거절함은 가장 끔찍하고 불행한 선택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하늘나라, 천국)’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가 죽은 후에 착한 일을 한 댓가로 보내지리라고 기대하는 하늘의 이상향을 ‘하늘나라’라고 표현합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늘나라는 일차적으로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늘나라, 곧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다스림이 펼쳐지는 곳, 이루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늘 공간 어디에 숨겨져 있는 장소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뜻합니다.

인간의 세상, 율법의 나라에서 ‘앓는 사람, 죽은 사람, 나병환자, 마귀 들린 사람들’은 절대 구원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자신의 죄 혹은 그들 부모의 죄 때문에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나라, 복음의 세계에서는 그들은 치유와 회복과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절대로 배제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올바른 관계”로 가장 먼저 초대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의 가치를 “하늘나라”의 빛 속에서 다시 보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분부대로 고쳐주고 살려주고 깨끗이 낫게 해주고 악을 쫓아내는 일을 실천할 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능력을 진실로 체험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삶입니다.(2005.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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