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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6월 8일 (연중 10주일) 강론초 (마태 9:9-13, 18-26 마태오를 부르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6. 7.

마태 9:9-13, 18-26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부르셨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 나섰다. 10 예수께서 마태오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세리와 죄인들도 많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게 되었다. 11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1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께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19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일어나 그를 따라가셨다.

20 마침 그 때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어떤 여자가 뒤로 와서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21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하고 말씀하시자 그 여자는 대뜸 병이 나았다.

23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러 피리 부는 사람들과 곡하며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 "다들 물러가라.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코웃음만 쳤다. 25 그 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간 뒤에 예수께서 방에 들어가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그 아이는 곧 일어났다. 26 이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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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 

“귀찮다”라는 느낌은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중요한 정서 중 하나입니다. 가정이나 직장 생활에서 이 “귀찮다”는 느낌은 은근히 문제를 일으키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위험하다”던가 “도저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던가 하는 정도의 판단이라면 우리 행동이나 관계를 결정하는 근거가 될 만합니다. 하지만 “귀찮다”는 느낌은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될 수는 없으면서도 실제의 우리의 행동과 감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요청을 받았을 때 먼저 “귀찮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 그걸로 사태는 끝장입니다. 내가 힘이 있다면 적당한 핑계로 그 요청을 거절할 것입니다. 내가 힘이 없다면 마지못해 요청을 따르지만 내심으로는 굉장한 짜증과 미움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귀찮다”는 말은 “귀(貴)하지 아니하다, 귀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귀찮다”는 느낌이 들 때 이렇게 바꾸어 물어보면 정확합니다. “이것은 내게 귀하지 않은 일인가? 그럼 대체 무엇이 내게 귀한 일일까?” 그러면 우리의 양심은 차분하게 대답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 일은 사소해보이지만 매우 귀한 일이야. 작은 일에 정성과 사랑을 담는 것이야말로 귀한 일이야!” 그러면 우리는 부탁받은 일을 행복하게 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좀 엉뚱한 말씀으로 서두가 길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자 사람들이 비난하는 대목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죄인을 부르러왔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귀찮아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는 교회를 고상하고 우아한 정결한 의인들의 모임으로 기대합니다. 하지만 참된 교회는 우리가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우리가 “죄인임”과 서로의 “죄인됨”을 귀하게 여길 때 시작됩니다. 우리가 죄인임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상태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사랑과 진리로 성숙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열 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의 옷자락에 살짝 손을 대고는 치유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실상 우리 인생은 순간 순간 하느님의 은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살짝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대던 여인의 그 마음은 우리 성공회 교인들과 비슷합니다.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도 우리는 대단한 열정으로 부르짖는 기도를 잘 못합니다. 하지만 부끄러울 정도로 조용한 기도를 바치고도 우리는 과분한 은총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이 때 이 일을 그저 우연한 행운처럼 여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어쩌다 운이 좋아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원에 몸소 귀하게 응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귀찮게 여기시지 않고 귀하게 여기신다는 이 사실이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은총은 우리가 무엇을 바치고 지켜서 받는 댓가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 귀하기 때문에 받는 사랑을 뜻합니다. 그 사랑을 마음 열어 받아들이면 우리 자신을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 사랑을 깊이 누리고 본받으면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 그 하느님이 나를 귀찮아 하지 않으시고 나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이 신비로운 사랑을 감사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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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질병, 죽음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 

인생을 괴롭히는 세 가지 문제, 즉 죄와 질병과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는 모두 자유롭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가 이 죄와 질병과 죽음의 문제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상태를 우리가 단호한 각오와 결심으로 우리 내면의 이런저런 심리적인 욕망을 끊어버리고 더욱 더 거룩하고 완전해진 상태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전하는 구원은 그런 내용으로는 충분히 이해한 것이 못됩니다.

우리는 우리 내면을 청소기 돌리듯 하여 쓸어버리고 정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죄악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버리고 싶은 우리의 욕망과 두려움과 어리석음은 여전히 우리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그것들을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어두움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죄를 하느님 앞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어떤 거리낌의 요소로 생각합니다. 죄 없는 거룩함으로 하느님 앞에 당당히 나가길 원합니다.

우리는 질병을 하느님의 징벌이나 저주로 생각합니다. 건강한 몸이라야 축복받은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죽음을 하느님의 심판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하느님도 어쩌지 못하는 무서운 운명으로 생각합니다. 신앙을 죽음마저 피할 수 있는 마법적인 능력인양 기대하거나 아니면 죽음의 문제는 슬쩍 피해가는 것이 인간적인 지혜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이런 생각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죄는 하느님의 자비 앞에 결코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죄는 용서받으면 됩니다. 죄는 정죄함으로는 권세를 부리지만, 용서 앞에서는 소멸됩니다. 죄 때문에 하느님 앞에 나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나가지 않으려는 것이 궁극의 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들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기로 합니다.

질병도 영원한 저주일 수 없습니다. 질병은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고쳐주시리라는 믿음은 미신적인 것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를 낫게 하는 귀한 믿음입니다. 죽음도 두려운 심판이거나 종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 살려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잠을 다시 깨우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우리 맘대로 우리 잣대로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호세6:6).” (2005.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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