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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6월 22일(연중12주일) 강론초 (마태10:24-39 두려워하지말라/ 칼을주러왔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6. 20.

마태 10:24-39

24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다. 25 제자가 스승만해지고 종이 주인만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 집 주인을 가리켜 베엘제불이라고 부른 사람들이 그 집 식구들에게야 무슨 욕인들 못하겠느냐?" 26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27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28 그리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단돈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런 참새 한 마리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

32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39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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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믿음으로 살기(마태 10:24-39)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주님은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한국교회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비난을 듣는 경우가 많이 생겼습니다. 참으로 마음 아프게도 그 비난의 이유가 종종 파렴치하고 몰상식한 주장과 행동 때문이고 그 교회는 진정한 반성 없이 도리어 “교회가 박해받고 있다!”고 주장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박해의 상황은 영적인 전쟁의 과정입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거짓된 가치관과 복음의 참된 가치관이 충돌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신앙의 이야기에는 얕고 깊은 두 차원이 있습니다. 얕은 차원에서 사람들은 실상 세상에서 성공하는 데에 필요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처세훈”을 원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일이 아니라 나의 소원을 성취하는 일이 주된 동기입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일이 아니라 세상에 적응하고 출세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둡니다. 이에 부응하여 “성공학강사, 경영컨설턴트”같은 설교자가 힘을 얻곤 합니다.

하지만 깊은 차원에서는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이야기를 듣기 원합니다. 온 세상을 다 얻는다 해도 참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살만큼 살고 얻을 만큼 얻고 누릴 만큼 누린 다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진리에 목마르고 사랑에 굶주리고 죽음 앞에 두렵습니다. 잔뜩 나의 “에고”를 무장시키고 그 에고의 욕망을 확장시킨 “우리”를 부풀려도 결국 우리는 허무하고 불안한 자신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상은 욕망을 추구하여 달성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그 일에 머리를 쓰는 일을 지혜라고 합니다. 욕망이 충족 안되면 그 실패에 분노하고 경쟁에 이기기 위해 힘껏 투쟁하라고 합니다. 세상은 육신을 위해 사는 것이 전부라고 하며 영적 세계는 심리적 환상일 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복음은 우리가 영적인 존재임을 일깨웁니다. 하느님의 충분한 사랑과 능력 안에 보호되고 있음을 약속합니다. 세상에 속하여 스스로 의로운 악인이 아니라 하느님나라에 속하여 하느님과 이웃 앞에 겸허한 죄인이 되기를 요청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자신을 못 박은 사람들, 이제 욕심과 어리석음과 분노를 내려놓은 이들은 참됨과 의로움과 평화로움에 대한 분별력을 갖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경험한 이들 곧, 창조주 하느님이 절대적 사랑의 통치자이심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들은 더 이상 세상에 속해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에 진정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믿음으로 세상의 평판과 손해를 이기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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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려워하지 말고 “칼”을 잡아라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10:34)
이 무슨 황당한 말씀일까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요한14:27)는
말씀이 주님의 말씀이 아닌가요?

주님께서 한 입으로 두 말씀 하시지는 않을 터이고, 그러므로 처음에 말씀하신 “평화”는 아마도 “세상이 주는 평화”라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주님은 말씀하신 바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평화를 간구합니다. 세상의 화평, 인간관계의 화해와 마음의 평안을 간절히 원합니다. 왜 신앙생활을 하느냐는 물음에 가장 많은 대답이 바로 “하느님께서 보장해주시는 평화”를 누리고 싶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세상의 평화를 주님의 평화와 혼동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어쩌면 실수라기보다도 짐짓 의도적으로 둘의 차이를 무시하고 세상의 평화를 주님의 평화인양 추구하는 지도 모릅니다.
 

왜일까요? 세상의 평화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에 비해 주님의 평화는 바로 나 자신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결정적인 차이를 깨닫고 기꺼이 나부터의 희생을 통해서 주님의 평화를 이루어가기로 헌신하고 작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미 완성된 상태의 평화를 보장해주시지 않고, 우리가 이루어갈 평화를 위해 우리에게 “칼”을 들려 주십니다.
칼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 칼은 성령의 검, 곧 주님의 말씀, 주님의 진리와 사랑입니다. (에페6:17 참조)
말씀의 칼은 우리의 감추어진 속셈과 생각을 드러내고 사탄의 계교를 무찌릅니다.(히브4:12 참조)
우리 손에 들려진 성령의 칼은 남을 정죄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칼은 우선 우리 자신의 욕망과 집착, 두려움, 우리 자신을 베어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정한 무사(武士)로 흔들림 없는 평화를 맛보게 됩니다.
두려워 떠는 자신이 이미 죽었고 부동의 평상심만 “사랑”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맨 손으로는 너무나 위험합니다. 어떻게 평화를 얻어내고 자신을 지키실 생각입니까? 칭칭 얽힌 혈연, 지연, 학연, 가족이기주의의 넝쿨을 어떻게 잘라내고 주님께 충성을 바치실 것입니까?
두려움을 떨치고 칼을 잡는 일, 즉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것이야말로 영적 승리와 깊고 깊은 평화의 확실한 비결입니다. (200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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