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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6월 1일 (연중 9주일) 강론초 (마태 7:21-29 산상설교의 마무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5. 31.

마태 7:21-29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22 그 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러나 그 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거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고 말할 것이다."
24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25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26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 29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이었다.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사오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뜻을 깨달아, 반석 같은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견고히 세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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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에는 하느님자녀가 갑니다^^ 

바울로사도는 복음에 관한 설명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느님의 사랑이 절대적이라는 점에서 시작합니다. 그 절대적 사랑을 굳게 신뢰하는 일이야말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살게 하는 능력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 바울로 사도의 편지가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여진 것들입니다. 나자렛 예수가 어떤 가르침을 펼치셨고 어떤 행적을 보이셨는가는 바울로 사도의 편지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바울로의 관심사는 역사적인 예수님의 실제 행적이 아닙니다. 부활하시어 그리스도로 높여지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의 구원을 주시는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바울로사도는 죄와 율법의 이중적인 굴레에서 신음하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서 제시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례와 성찬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인도하심을 받는 구원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율법을 지키며 살아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당시 유대인의 확신이요 상식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은 이제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치고 그 사랑을 받아누리는 방법은 단순한 율법준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의 능력에 대한 깊은 신뢰와 헌신과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기자는 바울로 사도보다 3-40년 후에 마태오복음을 기록하면서 바울로의 이 위대한 가르침에 대하여 보완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종종 그런 경향이 발견되지만 바울로의 가르침을 따르다 보면 자칫 신앙이란 예수님께 관한 특정한 구원교리를 시인하는 차원인 것처럼 오해하게 쉽습니다. 예수님을 전혀 만나본 일도 없는 우리^^ 이방인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고 고백하는 일은 자칫하면 “예수 = 그리스도” 라는 도식에 대한 동의에서 시작하여 그 그리스도(구원자)가 가능하게 해주는 구원의 내용을 자기들 나름의 온갖 인간적, 종교적 필요 속에서 가져다 목록을 만들기 십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다시금 깨우쳐 줍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 즉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누리는 일은 단순히 종교적인 추구의 결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다급하면 누구나 하느님을 찾기 마련이고, 또 필요하면 모두가 하느님께 원하는 것을 요청하고 응답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외적인 신앙생활은 실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아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알되 냉혹한 심판자가 아니라 우리의 자비하신 아버지로 아는 일입니다. 그 앎을 통해 우리는 죄의 종노릇을 하거나, 율법의 하수인 노릇을 그만두고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깨닫고 살아가는 일이 “올바른 관계”, 곧 구원받은 삶입니다. 하늘나라는 “종교적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 자녀”가 갑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온전히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지식과 교리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영”으로 되는 일입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영적인 지혜, 영적인 능력을 구하며 겸손히 정성스레 귀 기울이면 우리 모두 주님 말씀의 놀라운 권능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008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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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하고 평범한 삶 가운데 우리 신앙이 드러납니다 

은연중에 우리는 신앙생활이 특별한 지식(앎)의 문제인 것처럼 접근하기 쉽습니다. 성경을 알고, 교리를 알고, 교회 조직과 생활을 점차 알게 되면 믿음이 성장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지식이 특정한 분야별로 전문화되듯이 종교도 그렇게 특별하게 구분되는 삶의 한 영역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일주일에 하루(정확히는 두세시간^^) 정도는 기꺼이 할애하되, 다른 급한 일이나 여가 생활이 있으면 양자택일하여 시간사용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문화생활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은 절대로 그런 것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매 주일 빠짐없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일성수를 일상생활과 분리된 종교적 의무로서 강요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일성수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위한 것입니다. 한 주간의 일상생활을 정리, 반성, 승화하고 감사와 기쁨과 소망으로 다음 한 주간을 준비하는, 마치 대나무 마디처럼 자연스런 것이어야 합니다. 주일성수를 비롯한 모든 신앙생활은 교회를 위한 종교행위가 아니라 우리 삶을 풍요롭고 드높게 하는 감사와 겸손과 사랑의 수행이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예언과 축마와 기적이라는 대단한 종교적인 활동들이 도리어 신앙생활의 중심이 아닐 수 있음을 깨우쳐주십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진짜 알맹이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우리의 삶, 곧 희노애락과 생노병사의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교회생활을 통해서 드러나기 보다는 우리 내면과 우리 일상생활에서 그 열매로 드러나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날 시퍼런 작두 위에 올라가는 신기한 재주 일이 아니고 족집게처럼 점치는 능력도 아닙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와 같은 우리 내면의 인격의 성숙을 드러내는 성품들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내 가족이 병들었을 때 내가 어떻게 기도하는가, 내가 실패하고 좌절했을 때 나는 어떻게 하느님을 여전히 의지하는가, 정말 약하고 가난하고 늙어가며 우울하고 슬프고 답답할 때 그 때 나의 믿음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들은 우리가 머리로 ‘이런 교훈이 있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는 그런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네 삶과 죽음을 송두리째 주님께 맡기고 따르는 일입니다. 시련의 바람, 죽음의 큰물도 어쩌지 못하는 반석 같은 믿음 위에 우리 일생을 세우는 일입니다.(2005년 5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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