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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5월 11일 (성령강림주일) 강론초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5. 10.

요한 20:19-23

19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0 그리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21 예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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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곧 성령의 사람들 (요한 20:19-23)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영이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창조의 영이며 지혜의 영,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는 협조자이십니다.

오늘 성경은 사도행전의 기사를 통해 교회의 탄생이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고린도전서는 그 교회공동체를 위해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총의 선물을 골고루 주셨고 그 은사는 서로를 위해 섬기는 일에 쓰여야 함을 알려줍니다.
교회공동체는 하느님과 예수님에 관하여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꾸린 단체가 아닙니다. 같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연합된 살아있는 신비체입니다. 이 둘의 차이를 잘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믿음이 좋다거나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는 표시가 아닙니다. 성령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받게 되는 하느님의 숨결, 하느님의 기운,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을 받는 일을 마치 강신무가 신내림을 받는 것처럼 특별한 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이는 이미 성령을 받았음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머리로 하느님에 대한, 또는 예수님에 관한 어떤 정보를 처리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영”이신 하느님을 “영적으로 참되게” 아는 일을 우리 삶의 궁극적인 가치로 삼는 일입니다.

돈을 많이 벌거나 높은 지위를 얻거나 학식을 통해 인정을 받는 일은 물론 대단한 일이고 큰 축복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축복은 우리가 영적인 존재로서 하느님의 영을 깨닫고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큰 죄는 살인, 간음, 도둑질이 아닙니다. 절대의 자비이신 주님께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바로 성령을 모욕하는 죄, 성령을 거절하는 죄입니다. 성령님이 기분 나쁘셔서가 아닙니다^^. 성령을 거절하는 일은 곧 “하느님을 거역한 죄”, 즉 “사람이길 포기한 죄^^”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성령강림절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당신의 숨결로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음을 전합니다.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며 세상의 화해자로 파송하는 사명을 주시며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서로를 “성령의 사람”으로 기억합시다. 우리의 생각에 성령의 지혜가 가득하도록, 우리의 말에 성령의 능력이 넘쳐나도록, 우리의 행실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도록 서로 기도하고 격려하고 실천합시다.(2008.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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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이루시는 평화, 소명, 용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인사입니다. 유대인들의 일상 인사였던 이 <샬롬!>의 인사는 주님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담고 울려 퍼집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스승의 그처럼 어이없는 죽음에 놀라고 두려워 문을 닫아걸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건네신 인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얼마나 평화를 갈구합니까? 우리의 마음은 두려움에 늘 시달립니다. 우리의 환경은 불화와 갈등과 전쟁의 위협으로 가득합니다.

오늘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시는 이 인사를 듣습니다. 너무도 귀한 이 평화의 축복을 진정 누리시길 바랍니다. 

십자가 수난을 앞두시고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안전함을 지키기 위해 문을 닫아걸고 끼리끼리 누리는 평화입니다. 문을 닫고 벽을 높인 후에 우리는 그 뒤에 숨어 불안한 평화를 누립니다. 누군가 우리의 그 불안한 평화를 위협하는 것 같으면 가차 없이 공격을 불사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평화가 아닙니다. 평화를 가장한 세상의 불화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하느님께서 사랑과 전능으로 보장하시는 평화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이를 심판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평화는 닫아건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게 해주는 용기입니다. 두려움은 용기로 맞서야 합니다. 증오는 용서와 화해로 풀어야 합니다. 어리석음은 대화와 이해로 벗어나야 합니다. 죄악과 죽음은 사랑과 희생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일이 바로 그 일이었고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소명>이 바로 그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예수님은 성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자각으로 짧은 일생을 찬란하게 사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자각으로 유한한 인생을 살아갈 때 기쁨과 보람과 영원한 생명이 보장됩니다.  

무엇을 위한 소명, 보내심, 파송입니까?
<용서>를 위한 파송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의 벽을 허물고, 세상의 온갖 장벽을 허물고,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고 용서하며, 세상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절망한 세상을 향해 새 희망, 새 출발을 제시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평화>로, <소명>으로, <용서의 삶>으로 이루어지는 바, 이모든 일은 바로 주님의 영,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이루시는 일인 것입니다. (2005.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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