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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4월 27일 (부활6주일) 강론초 (요한 14:15-22 협조자 성령)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4. 27.

  요한 14:15-21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기어이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지나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지만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터이니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20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21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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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계신 협조자 성령님 (요한 14:15-22)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통속한 유행가 가사입니다.^^ 자, 하느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본래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바다같이 넓고 깊은 단절이 있었습니다.
창조주 앞에 피조물로서의 유한함과, 절대자 앞에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죄성이 그 간격을 메울 수 없는 심연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느님께서 몸소 그 심연을 넘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증언합니다. 구약의 신앙인들은 자신들을 “노예상태”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며 풍요로운 새 나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을 “만군의 주님”으로 경험합니다.
그 유일하신 분을 성전제사와 율법준수를 통하여 섬기기로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의 간극은 사라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영(靈)이신 것과 우리 인간이 또한 영적(靈的) 존재인 것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참되게” 드리지 못하는 성전제사는 도리어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이 빠진 율법준수는 헛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때를 따라 하느님께서는 결정적으로 새로운 일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을 “우리 곁에 오신 하느님”으로 보내주신 일입니다.
이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되는 일, 다시말해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자유로 응답하고 기쁨으로 순종하며 사랑을 누리는 일을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 하느님나라를 가르치시고, 그 하느님나라를 드러내 보여주시고 그 하느님나라를 향한 길이 되셨습니다.
 

그 “하느님나라를 살아가는 일”을 예수님은 “사랑의 일”이라고 하시고, 우리들은 “계명의 일”이라고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교회가 명하는 이런저런 계율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일로 모든 계명의 목적이 완성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하여 구하면 건강과 재물과 명예와 권력의 소망을 이룰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다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일치하는 일, 곧 하느님나라를 누리는 일,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 일은 우리가 노력으로 성취하는 일이 아니라 협조자 성령님의 도움으로 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영, 곧 예수님의 영은 우리를 사로잡아 “일치와 친교”를 이루십니다. 우리의 구원의 내용인 하느님나라, 영원한 생명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사로잡아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 성령께서 사랑의 계명을 사랑의 기쁨으로 실천하게 하십니다.
그 성령께서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주님 몸의 지체가 되게 하시고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 공동체를 주님의 몸으로 일치되게 해주십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성령님”을 깨닫는 우리는 절망과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과 기쁨의 일치를 경험합니다. (2008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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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조자 성령님을 의지하는 삶 (요한 14:15-22) 

하느님의 사랑은 한결 같으시지만, 인간들은 그렇지 못하여 우리네 신앙생활에는 파동이 있게 됩니다. 고양되는 믿음의 시기가 있고 때로는 침체되는 시기가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침체된 시기의 우리 마음에 여운 깊은 아픈 울림이 됩니다.

머리로(知)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분명 이해합니다.
우리의 찬양과 사랑을 원하셔서 우리를 지으시고, 하느님을 떠나 죄와 고통과 죽음에 신음하는 우리를 구해주시려 외아들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랑과 용서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가슴으로(情) 우리는 그 사랑에 깊이 감동합니다.
이 세상 그 누가 이 보잘 것 없는 우리에게 그토록 사랑하기를 간청하고, 또 그토록 엄청난 사랑을 값없이 베풀어줍니까? 우리가 어버이의 사랑을 찬탄하고 기리는 것도, 첫눈에 반해 자신을 불사르는 연정을 노래하고 동경하는 것도,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러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절대적인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 자유로운 의지로써(意) 결단을 합니다. “주님 사랑을 깨달았으니 이제 내 일생을 주님께 바칩니다. 옛사람 나는 이미 죽었고, 새사람 저는 주님 안에서 순종하고 사랑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겠나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아직 우리의 삶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머리에는 끝없이 이런저런 의심이 일어납니다. 뜨거웠던 감동도 시간이 흐르면 차츰 약해지기 마련이고 다 강력한 체험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우리의 다짐도 세상의 유혹과 시련에 가시덤불 속의 씨앗처럼 숨 막힙니다.

주님께서 연약한 우리의 이 모든 사정을 모르실리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또 다른 협조자”,“진리의 성령”님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홀로 고통의 바다를 떠돌며 신음하고 눈물짓지 않습니다.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주님의 모습은 뵈이지 않고, 유혹과 시련이 삼킬 듯 몰려올 때, 정녕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의심이 들 때, 우리는 망설임 없이 협조자 성령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생활이 힘겹고 우울하며, 병고가 닥치고 경제적인 궁핍에 두렵고 심란할 때, 우리를 지키시고 이끄시는 보혜사(保惠師) 성령님을 부르십시다.
세상 일, 가정 일은 고사하고 내 육신, 내 마음조차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와 함께 사시며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신” 성령님을 의지합시다. 그것이 우리에게 약속된 가장 큰 축복과 은총입니다.(2005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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