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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7월 13일(연중15주일) 강론초 (마태 13:1-9, 18-23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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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3:1-9, 18-23

1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더니2 사람들이 또 많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그대로 모두 호숫가에 서 있었다.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먹었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6 해가 뜨자 타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랐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9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18 "이제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내포한 뜻을 들어보아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간다.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20 또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곧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21 그 마음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 가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오면 곧 넘어지고 만다. 22 또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23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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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되어라, 말씀을 들을 귀! (마태13:1-9,18-23) 

말은 무성하지만 말씀은 귀한 시대입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귀는 많으나 들어야 할 말씀을 들으려는 귀는 드물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은 ‘말’을 높여 ‘말씀’이라고 표현합니다. 말은 정보나 지시를 담습니다. 말씀은 인격과 뜻을 담습니다. 말을 하는 상대에 대한 존경과 존중이 필요 없을 때에는 그저 말을 하고 말을 들었다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원하는 정보를 얻고 필요한 지시를 들었다는 것으로 됩니다.
하지만 말을 하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전제되었을 때는 말씀을 하시고 말씀을 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의 전달문제가 아니라 말씀을 주시는 이와의 인격적인 소통입니다.

인간은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참된 인간이 됩니다. 강아지도 훈련을 통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만 말씀을 알아듣지는 못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기대하는 것은 강아지가 조련사의 말을 듣는 차원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신의 뜻이 자신의 분신과 같은 자녀에게 같은 수준으로 공감을 얻길 바랍니다. 부모는 무엇보다 자신의 사랑이 자녀의 마음에 전해지길 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나라의 소식은 말로 전해지는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하느님나라에 관한 복음은 말의 차원이 아니라 말씀의 차원으로서 우리의 인격적인 응답을 요청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비인격적인 능력이나 원리가 작동하는 세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인격적인 사랑과 진리가 우리들 영적인 인간을 휘감아 살려가는 역동적 관계입니다. 곧,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하느님의 임재를 느끼는 만큼 참된 우주와 참된 인간인 자기자신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깨닫는 이, 하느님과 소통하는 이는 삶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과 경험의 한계에 스스로 갇혀서 그것을 세계라 부르며 자신의 만족을 성공으로 생각하고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식하는 이는 ‘자아’라는 자신의 감옥에 갇히지 않고 초월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창조세계 안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행복해하며 감사합니다. 자신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모두 하느님께 달린 일임을 깨닫고 자신의 일생을 하느님께 의탁합니다.

자신의 밖에서 얻게 되는 것, 자신의 생존과 생활을 위한 외적인 조건들을 파악하지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성품과 자신이 맺는 관계들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자신의 선입견과 기득권을 넘어서며 새로운 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변화시켜 갑니다.
믿음은 이렇게 “들을 귀”로 들으며 사는 일입니다.

들을 귀가 주님의 말씀을 열매 맺게 합니다.
들을 귀의 문제는 당연히 청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리에 대한 갈망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선입견과 기득권을 넘어서서 새로운 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들을 귀의 문제는 정보량의 문제가 아니라 경청의 문제입니다. 말씀하는 이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일회적인 청취와 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인 되새김과 순종의 문제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이 변화의 경험이야말로 하느님나라의 경험이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님께서는 언제 무슨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어떤 말씀에 가슴이 뛰고 전율을 느껴보셨습니까? “그래 이것이다!”하는 감격스런 때가 언제이십니까? 마음 속의 의문이 스르르 풀려나가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답답함이 후련해지고 어두움이 환해지던 깨우침의 순간이 어느 때였습니까?

우리 안에 자라나는 말씀의 성장은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는 나날이 지혜로워지고 있습니까? 더욱 여유로워지고, 너그러워지고, 참을성이 많아지고, 사랑이 깊어지고 있습니까? 눈에 뵈지 않는 그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십니까? 십자가에 피흘리는 희생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 감동하십니까?

성령을 따라 사노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우리 안에 성령의 9가지 열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의 품성이 익어가고 있습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세상의 말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세상의 말이 규정하던 우리의 머릿속을 비우고 주님의 말씀이 뿌려진 우리의 마음밭을 가꿉니다.

공연히 말씀의 능력을 의심하고 말씀의 진리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들을 귀”입니다. 우리에게 들을 귀가 있으면 말씀은 반드시 우리들 안에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2008년 7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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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씨앗으로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 - 인생은 말씀 농사 

“왜 믿는가?” 에 대한 답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복 받아 잘살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쉽게 와 닿고 솔깃하긴 해도 무언가 2%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동물이 만약 신앙을 가질 수 있다면 바로 “안전하고 배부르게 먹고 사는 것”을 위해서라고 답할지 모르지요.^^ 현세에서 편히 잘살자는 욕구는 동물보다 그다지 나을 것 없는 수준입니다.

“죽은 다음에 천당,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는 답은 좀 실감은 덜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중요하다는 느낌은 듭니다. 하지만 실상 이런 동기는 생각보다 그리 영적인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여전히 이기적인 욕심이고 속된 소망이고 육적인 일일 수 있습니다. 참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나 개인에게 보장된 천국티켓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응답하며 서로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위해서” 라는 대답은 어떻습니까? 상대적으로 공감하기 쉽고 고상하고 인간적인 바램입니까?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이 대답 역시 여전히 이기적입니다. “하느님”보다도 하느님이 보장하는 “내 마음의 평안”이 더 소중하다고 여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에 대한 답은 베드로의 고백을 따라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가지셨기 때문”(요한6:68)이라는 것이 정답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단순한 현세의 복락이 아니고 사후의 천국입성도 아니고 개인의 마음 속 평안도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한없는 은총으로 말미암는 생명과 삶입니다. 유한한 우리의 육신, 죄악에 노출된 삶과 피할 수 없는 죽음마저도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기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다스림이 우리를 지키고 이끌고 살리시기에 “영원한 생명”(요한복음)은 곧 “하느님 나라”(공관복음)입니다.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는 완성된 상태로 밖으로부터 주어지지 않고 말씀의 씨앗으로 우리 마음에 뿌려집니다. 인생은 말씀농사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마음을 향해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말씀을 좋은 밭에 대한 교훈으로 들으시며, 나는 아무래도 “밭이 안좋아”하고 지레 실망하시면 안됩니다. 도리어 “주님께서는 밭을 안 가리고 씨를 뿌리신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마음속 여기저기에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분명 좋은 밭이 있습니다. 거기에 주님의 말씀이 이미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은 반드시 우리 마음에 성령의 열매로, 하느님의 나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2005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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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 뿌리는 이의 믿음과 소망 

복음을 전하는 일은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내듯 되지 않고 마치 농부가 농사를 짓는 일처럼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나 전해 받을 때에 어떤 자세여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첫째,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밭이 길바닥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되지 않도록 돌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일에 바빠 무관심해지거나 교회의 가르침과 의무를 부담스러워하거나 그저 아무 방해 없이 내 뜻대로 내 욕심을 채우려고 든다면 어떻게 믿음이 자라나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둘째, 복음을 전하는 자세입니다.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낙심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좋지 못한 곳에 뿌려진 씨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한 대신에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 하나로부터 수십 배의 결실을 얻는 것처럼 우리가 농부의 마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꾸준히 복음을 전한다면 누군가는 그 복음을 받아들여 백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태도로서 하느님나라의 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해나가셨습니다.  

세상 속에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무관심(길바닥)을 이기고 시련(돌밭)을 이기고 유혹(가시덤불)을 이기며 자라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전도노력이 성령이 인도하심을 따라 몇 십 배, 백배의 놀라운 결실로 맺어지리라는 것을 가슴 깊이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믿으셨듯이 우리도 굳게 믿어야 합니다. (2002년 7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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