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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7월 20일(연중 16주일) 강론초 (마태 13:24-30, 36-43 밀과 가라지의 비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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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3:24-30, 36-43

  24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26 밀이 자라서 이삭이 팼을 때 가라지도 드러났다.

27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주인님,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주인의 대답이 '원수가 그랬구나!' 하였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을 뽑아버릴까요?' 하고 종들이 다시 묻자 29 주인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30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버리게 하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게 하겠다.' 하고 대답하였다."

36 그 뒤에 예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들어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와서 "그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37 예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요, 추수 때는 세상이 끝나는 날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아서 묶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끝날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41 그 날이 오면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내어 42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43 그 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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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 땅에서 하느님나라를 사는 일 (마태 13:24-30, 36-43) 

마태오복음 13장은 하느님나라에 관한 7가지 비유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비유를 통해 알아들어야 할 말씀은 하느님나라의 본질을 이해하고 하느님나라를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정보가 아닙니다.

하느님나라는 보통 생각하듯 죽은 후에 가길 원하는 저 세상이 아닙니다.
우주 공간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이상향이 아닙니다.
오늘 이 세상을 사는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는가의 문제가 하느님나라의 본질입니다.

가라지의 비유를 들으며 우리는 이른바 “예수를 잘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가고, 안 믿으면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진다”는 식의 메시지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복음 본문을 깊이 묵상하시면 그런 이해를 넘어서는 더 깊은 의미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우선 가라지가 자라던 이 세상이야말로 바로 “하느님의 나라”(자기나라, 40절)와 다르지 않음을 주목하십시오. 주님의 관심과 사랑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우리의 삶에 집중됩니다. 주님의 엄위한 심판은 주님의 의향이 아니라 우리 삶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믿는 자로서의 우리의 삶의 가치와 그 보상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믿어서 더 행운을 누리고 더 인정받는 삶을 살고 죽은 후에도 복락을 약속받는 것일까요? 그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밀인 자기본성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차이는 외양의 미묘한 차이가 아니라 알곡을 맺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차이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 가라지 같은 인생을 살까 하는 유혹을 받기도 하고, 또 세상에서 자신만을 생각하며 태연히 살아가는 가라지 같은 인간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밀은 가라지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고 적대감을 가질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밀의 본성을 깨닫고 그것을 잘 실현하여 알곡을 맺는 일에 만족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바로 그 평범한 자세야말로 하느님께서 내신 이 삶을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 사는 일입니다.
그 일이야말로 실은 우리가 바로 하느님나라를 사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나라에 사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구원은 밀로서 사는 것 자체로 충분합니다. 밀이 금싸라기가 되는 게 구원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에 진리의 양식을 대는 밀밭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뿌리신 뜻대로 살아가며 성령의 바람에 영글어가는 황금빛 밀들입니다. (2008.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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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과 가라지가 왜 함께 자라는가 (마태 13:24-30, 36-43) 

“물음표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낚시바늘로 변하여 고통을 준다”고 어떤 이는 표현합니다만, 우리는 진실로 고통스럽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선하시다면, 왜 세상에는 죄악과 고통이 있는가?”  

가라지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비유하시되 마치 밀과 가라지가 섞여서 자라는 밭과 같다고 하십니다. 좋은 씨를 뿌린 밭에 원수가 몰래 가라지를 뿌리고 갑니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이삭이 패고 보니 가라지(강아지풀)의 가짜이삭이 드러납니다. 즉시 뽑아버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종들에게 주인의 답은 뜻밖입니다.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 때에 가라지는 뽑아서 불태우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 들이겠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는 서두의 질문에 몇 가지 답을 얻게 됩니다.  

① 우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늘나라는 분명 우주공간 저편이나 사후세계의 이상향이 아닌 듯합니다. 그곳에는 가라지 따위는 없을 테니까요. 예수님의 관심은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늘나라가 아니라, 이 땅위에서 이루어질 하늘나라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여기, “악한 이가 잘되고, 선한 이가 고통 받는 현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가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구체적인 현실엔 나 몰라라 하며 홀로 저 세상으로 옮겨지기를 바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② 그리고 우리는 주님 말씀을 통해 이 세상이 본래 선하게 지어졌음을, 이 세상의 죄악과 고통은 하느님의 뜻이 아님을, 하느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그 원인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일에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③ 또한 우리는 심판 때까지 우리 가운데 죄악과 고통이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절대로 죄를 짓지 않고 악을 뿌리째 박멸하고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도록 하는 일은 우리 능력을 넘어섭니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죄악과 고통을 해결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또 다른 죄악과 고통을 일으키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성령을 추종하여 죄는 용서하고, 악은 맞서서 이겨내고, 고통은 사랑으로 감싸주는 일입니다.  

④ 그리고 우리는 추수 곧 심판의 엄위함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심판의 기준은 인생의 알곡을 남기는가에 있습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밀처럼 열매가 있는 인생이 있고 가라지처럼 열매가 없는 인생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본성을 찾고, 하느님을 알아, 사랑과 인내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삶, 추수 심판을 즐거이 기다리는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2005.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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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가라지 (마태 13:24-30, 36-43) 

이 땅에 그리스도인이 천만 명이라는데 복음의 가치가 진실로 실현되는 곳은 어디입니까?
다른 이에게 물을 것도 없습니다. 우선 나부터가 과연 복음을 따라 사는지, 진실로 성령을 따라 사는지 스스로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서 믿음의 결실을 도둑질하는 “가라지”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세례받을 때에 거절하기로 약속한 “마귀와 세속과 정욕”이 바로 우리 삶의 가라지입니다. 

정욕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이 세상에서 네가 가장 중요해. 그리고 네게는 자유가 있잖아. 네 마음대로 네 욕망을 채우는 길이 최고야.”  

세속은 이렇게 거듭니다. “세상은 세상의 논리를 따라 살아야지, 어리석게 신앙적인 가르침을 따라서는 안돼. 이 놀라운 과학문명과 자본주의의 성과를 생각해봐. 네 믿음이란 얼마나 초라한 거야? 돈과 명예와 권력 없이 교회인들 대체 무슨 힘을 쓸 수 있겠어.” 

천사처럼 가장할 능력이 있는 마귀는 이렇게 중얼거리는지도 모릅니다.

“신자라고 해도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만 한다면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쯤은 얼마든지 눈감아 줄 수 있어. 선한 동기로 선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기껏 하느님을 잘 이용하려 드는 것이라면 내가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겠어.” 

밀 이삭이 패일 때 가라지가 드러나듯이, 우리가 살아가며 복음의 가르침대로 따르려고 할 때에 마귀와 세속과 정욕이 달려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2002.7.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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