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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2월 10일 (사순1주일) 강론초 (마태 4:1-12 광야에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2. 9.

마태 4:1-11

1 그 뒤에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고 나서 몹시 시장하셨을 때에 3 유혹하는 자가 와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께서는 "성서에 '1)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하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1)칠십인역 신명 8:3.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성서에, '2)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 하고 말하였다. 2)시편 91:11-12.

7 예수께서는 "'3)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3)칠십인역 신명 6:16.

8 악마는 다시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 9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10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4)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시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4)신명 6:13.

11 마침내 악마는 물러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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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의 본질”- 구원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마태 4:1-11)

 

신앙생활이란 살아있는 인간이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죄는 그 관계가 깨어진 상태에서 살아가는 일이고 그런 상태의 삶은 결국 참된 삶의 경험 없이 허망한 죽음으로 소멸될 뿐입니다. 절대자 하느님의 절대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인간의 삶이란 안개와 같은 것이지요.

구원은 그 관계가 회복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일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성숙시켜서 성령의 열매를 거두게 합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과 생각과 느낌과 의지를 소통하는 지극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하여 죄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은 이들입니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구원입니다. 의심없이 믿고 담대히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구원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구원은 우리 머릿속 관념이 아니라 우리 일생의 삶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필립비의 교우들에게 말합니다. “...지금에 와서는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필립2:12)

이런 말씀들을 기억하며 우리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광야의 유혹의 본질을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 유혹은 신앙의 유혹(시험)인데 이는 하느님을 전혀 모를 때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개 유혹이란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비신앙 사이에서의 택일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갖는 일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급하면 부르짖는 것이 하느님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신앙을 통하여 평범한 삶을 일생토록 살아가는 일입니다.

신앙을 가지면서 우리는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가 마술적으로 해결되어 곧바로 구원과 생명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유혹의 본질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과제를 손쉬운 신앙적 설명으로 대치해버리고 싶은 유혹입니다.

물론 은총으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은 즉각적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 삶의 고통스런 현실들이 증발해버리고 만사 오케이의 현실만 남는다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도리어 구원은 엄연한 우리 삶의 고통을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능력으로 살아내는 일이 됩니다. 황당한 일이지만 “이미 구원 받았으므로 더 살아서 구원이 훼손되기 전에 빨리 삶을 포기하고 천국에 가기위해 자살을 하자”는 어리석은 이들이 실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받는 시험의 본질은 바로 구원에 대한 환상적인 이해입니다. 신앙적인 유혹이란 자기의 욕망과 성공을 위해서 하느님을 내세우고 하느님을 좌지우지하는 듯한 신통력을 자랑하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오늘 이 땅의 교회들과 신자들을 보십시오. 과연 이 유혹을 이기고 있습니까?

이 시험을 이기는 길은 단순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하루하루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길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길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을 닮아 사는 길이 최선입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다시 한번 말씀과 기도생활로 깊이 되돌아가는 시기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통하여 무엇을 얻어내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통하여 우리 자신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일생 살아내는 일이 곧 십자가의 길이고 부활의 길입니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립 2:12-13)(2008. 2. 10. 강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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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의 본질”- 하느님을 적절히 이용하고 무시하기
(마태 4:1-11)

 구원의 본질이 “하느님과의 화해,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라면 죄의 본질은 “하느님과의 불화, 곧 하느님과의 그릇된 관계”일 것입니다. 죄란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삼고자 하여 자연과 다른 사람과 마침내는 하느님마저도 자기의 욕망과 통제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태도입니다.

  창세기가 들려주는 타락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죄의 본질을 밝혀줍니다. 모든 것이 충분히 아름답고 넉넉하게 허락되었으되 다만 한 가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는 따먹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 금지는 그 열매가 귀하고 아까워서가 아니라, 인간이 피조물로서 자신의 욕망과 판단대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인간은 하느님과 자연과 다른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로는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과 대비되는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을 강조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님은 철저한 순종을 통해서 인간의 참된 삶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하느님 성부께 의탁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모든 인류에게 무한정 베풀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기적인 동기를 포기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들이 우리를 억압하고 비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진정 자유롭고 풍요롭게 함을 믿는 것입니다.

구원은 겉치레의 신앙생활로서 보장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의 깊은 동기가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진정 이기적인 동기를 포기했을까요?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재물을 바라고, 기적을 바라고, 부귀영화를 바라는 것은 매우 신심이 깊은 태도처럼 보이지만 실은 여전히 죄에 물든 태도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 가지 유혹은 바로 이 동기에 대한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이란 결국
“하느님을 적절히 이용하고, 결정적일 때는 무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용되거나 무시될 분이 아니라,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의 순종을 받으시고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연약하고 의심 많고 욕심 많은 우리들도 우리 삶 가운데 40일 광야 같은 고통의 순간들 마다 주님의 이 명쾌한 대답을 택하고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2005. 2. 13 강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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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도에는 저도 착실히^^ 원고를 전부 써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옮겨봅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유혹을 이기신 주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오늘은 사순절의 첫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축일을 앞두고 40일동안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시 한번 반성해보는 기간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때에 세 가지를 약속합니다. 기억하십니까?

제일 먼저 마귀와 세속과 정욕을 거절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신경의 내용, 즉 창조주 하느님과 구세주 예수님과 보혜사 성령님과 교회와 영생을 믿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명하신 계명을 지키기로 약속했습니다.

사순절 기간동안 우리는 바로 이 세례의 약속을 새롭게 다짐하게 됩니다.

그 다짐이 바로 극기하고 절제하는 생활로 표현됩니다.
힘써 자선과 선행을 하는 일로 표현되고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일로 표현됩니다. 

오늘 성경 독서 전체를 흐르는 주제는 인간의 나약함과 유혹, 그리고 그 유혹을 이기는 구원에 대해서 입니다.

구약성경은 태초에 첫사람 아담과 그의 아내가 유혹에 빠져 이른바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을 저버리고 낙원을 잃어버리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성경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낮과 밤을 단식하신 후 악마의 유혹을 받았고 이겨내신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신성경은 바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은 은총을 대비하여 우리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혹"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유혹의 근거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본질은 밖에서 조성되는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우리들 내면에 있는 자기 중심성, 자기 욕심과 어리석음입니다.

사기를 당하는 일은 정말 억울한 일이지만, 사기꾼들의 말에 따르면 사기당하는 사람은 대부분 다소간에 “잘못된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기에 걸려든다고 말합니다.

성서에도 하느님이 사람을 유혹에 빠뜨린다고 말해서는 안되고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야고보 1:14)”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온다는 말씀도 이어집니다.

엊그제 TV에서 0000회라는 종교가 많은 민원을 일으키고 있다고 고발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만만해 보이는 사람을 찾아가서는 조상신에게 정성을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생긴다, 또는 정성을 드리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꼬드깁니다. 정성이란 돈을 내고 제사를 드리는 것인데 오십 만원부터 시작해서 천 만원을 낸 사람도 여럿 있었습니다. 하여간 일단 꼬임이 먹혀들고 관심을 보이면 수단방법 안 가리고 돈을 바치도록 하고 이른바 치성을 드리도록 유도합니다. 그리고 일단 시작하면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계속 해서 재산을 바치도록 달라붙어 세뇌공작을 한다고 합니다. 결국 자기 살림살이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리한 헌금을 하게 되어서 가정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또 그러면 가출을 하라고 유도하고 해서 점점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백칠십만 신도에 어마어마한 재력을 자랑한다는 신흥종교입니다.
 
저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되도록 좋은 점을 먼저 보려고 하는 편이지만 이런 식의 종교라면 단언컨대 참된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거기에 걸려드는 그 불쌍한 이들입니다.

정성을 안드리면 불행해진다고 하는 위협이 두려워서, 정성을 드리면 행운이 온다는 유혹이 솔깃해서 없는 살림에 카드빚을 내서 돈을 갖다 바치는 그 가련한 이들이 그토록 많다는 것 아닙니까? 그야말로 자기 욕심과 어리석음이 종교와 결부된 전형적인 사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욕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유혹에 걸려들게 마련입니다.

창세기의 타락이야기는 우리 이야기입니다. 먹음직하게 탐스럽고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 금지된 열매에 침을 흘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합리화해주는 뱀의 소리에 용기를 내어 열매에 손을 댑니다.

유혹의 본질은 스스로의 욕심이고 욕심의 본질은 바로 자기 중심적인 마음과 생각입니다. 욕심의 종류와 차원은 다를지라도 육신과 자아를 가진 모든 사람은 누구도 욕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따라서 유혹에 누구나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악마의 유혹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자의식을 향한 것이기에 세속적인 안일과 쾌락과 탐닉 땨위의 유혹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역시 육신과 자아를 가진 온전한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에 대한 시험입니다.
 
그리고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이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이 세상에 구원의 길, 그리스도의 길을 펼치실 것인가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돌로 빵을 만들어 보라”는 악마의 첫 번째 요구는 육신의 욕구와 관련된 경제적인 차원의 유혹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육신적인 요구, 경제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것만큼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또 있습니까, 이 일에 나서서 당신의 유능함을 과시해보십시오 하는 것이 유혹의 내용입니다.

몸을 가진 인간, 먹어야 사는 인간, 이른바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는 인간들이기에 경제적인 문제는 너무나도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마치 하느님나라도 먹고 입고 사는 것이 풍족한 곳으로 여겨질 만큼 경제적인 요소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인간의 영적인 차원을 더 강조하십니다. 영적인 깨달음 없이 인간의 경제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과학기술이 상품생산에 이용되기 시작한 산업혁명 이후에는 밀가루로 빵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서 돌, 즉 지하자원으로 빵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굶주림이 해결되었습니까? 현재 전 인류를 먹이고도 남을 식량과 자원을 생산해낼 수 있지만 여전히 가난한 나라에서는 굶어죽는 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 세상의 문제는 빵 자체가 부족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이 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둘째 시험은 종교적인 능력을 과시하여 하느님께 인정받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라는 유혹입니다.

마치 네가 그토록 물질에는 초연하단 말이지, 그렇다면 차원높게 유혹해주지 하는 사탄의 중얼거림이 들리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유혹이고 오히려 더 이기기 어려운 유혹일 수 있습니다.

짐짓 경건해 보이고 확고해 보이는 우리의 믿음 뒤에는 하느님을 내 뜻대로 좌우하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힘을 빌어 기적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합니다.

자기 믿음을 증명해 보이려고 독약을 먹고도 안 죽으리라고 장담하다가 죽어간 실화가 예전에 있었습니다만, 그는 자기 믿음을 내세우려다 천하에 없는 모욕과 불명예를 하느님께 돌려드렸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일을 굳센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시험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천사의 도움 없이 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가셔서 “어디 하늘에서 누가 와서 구해주나 두고 보자”하는 빈정거림을 들으며 외로이 처절하게 돌아가시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그 분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자기 과시가 아닙니다. 믿음은 겸허한 자기 비움과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셋째 유혹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얽매이지 말고 눈에 보이는 온 세상을 얻으라는 유혹입니다.

악마는 세상의 모든 왕국을 보여주며 자기 앞에 엎드려 절하기만 하면 그것을 모두 주겠노라고 유혹합니다. 이것은 권력과 명예, 출세에 관한 유혹입니다. 자기 실현과 자아성취를 포함하는 정신적이고 정치적인 욕망에 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얼마나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내심으로 동경합니까? 세상의 권세가 하느님나라를 이룩해주는 지름길인 것처럼 여기고 엄밀한 반성 없이 너무 쉽게 세상에서의 출세와 평판과 인정을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연 우리의 심중에 하느님만을 예배하고 그 분만을 섬기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권력을 하느님보다도 더 높이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정치권력의 종노릇을 할 뿐입니다.

이 모든 유혹은 인간성에 숨어있는 “자기 중심적인 성격”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욕심많고 어리석은 우리의 인간성에 대하여 네 욕심을 채워라, 네 생각대로 결정해라고 속삭이는 악마의 유혹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유혹을 어떻게 물리치십니까? 보십시오, 단 한 가지도 자신에게 속한 그 무엇을 내세우지 않고 철저히 성경의 말씀에 의지하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유혹에 대한 승리의 비결입니다.

구약 신명기의 “하느님은 한 분 뿐이시다. 네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 는 말씀을 의지하여 예수님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은 기적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를 보장해주거나 종교적인 확신과 평안을 보장해주는 것도 예수님의 사명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인정을 받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리는 것이 예수님의 원하신 바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은 자기희생의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은 한없이 남을 위하는 이타적인 사랑의 능력입니다. 비록 두려운 길이었지만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는 기도의 능력이고 순종의 능력이었습니다.

자기 능력이나 판단이 아니라 늘 하느님을 의지하고 하느님께 겸손히 순종하는 자세가 예수님을 승리자, 그리스도, 곧 하느님과 하나 된 분으로 되게 한 것입니다.

사순절에 우리가 극기하고 절제하고 자선과 기도의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이 일들은 우리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우리 자신의 공로를 세우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우리의 강한 의지로 유혹을 이겼다는 자만심이 생긴다면 도리어 그것은 우리의 육신과 자아를 강화하는 잘못된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우리의 어리석고 무력하고 나약함을 철저히 깨닫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과 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허락된다는 것을 깨닫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사로운 욕심과 고집과 편견을 버리고 겸손히 분별을 구하는 때가 되어야 합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운명을 깊이 묵상하면 우리의 욕심이 덧없음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극기하고 절제하는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육신을 넘어서는 신령한 세계, 영적인 차원을 더욱 예민하게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배부르게 먹는 쾌감을 능가하는,배고프지만 먹는 욕심을 넘어선 담담한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육체가 요구하는 순간의 쾌락 대신에 좀 더 깊고 영원한 삶의 보람과 영적인 기쁨을 알게 됩니다.

말씀을 깊이 알수록 우리는 더욱 더 하느님의 뜻을 잘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말씀은 모든 것을 분별하는 중요한 권위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생활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나를 잊어버리고 하느님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우리는 흙으로 돌아갈 존재요, 티끌만도 못한 주제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누리는 모든 기쁨과 사랑과 행복과 영생의 소망은 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와 생명의 숨결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와 여러분 모두 아마도 여전히 유혹에 약한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이 사순절에 굳은 마음을 먹고 이런저런 습관을 고치기로 약속을 하셨다 해도 아마도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또 이런 저런 일을 새로이 해보리라고 계획했다 해도 다 이루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그 약속 자체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선한 예물입니다. 주님께로 향한 우리의 착한 마음입니다. 겸손하고 소박한 마음입니다.

비록 작심삼일이 된다고 하여도 우리는 또 다시 하느님 앞에 약속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그렇게 나약하고 어리석고 가련한 존재이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또 다시 구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작심삼일이니까 사흘에 한번씩 우리의 결심을 새롭게 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우리가 사흘에 한 번 하느님의 사랑어린 점검과 도움을 받는다면 우리의 일생은 조마조마하지만 기대해 볼만한, 늘 하루하루 적당한 긴장감과 성취감이 교차하는, 실망감도 있지만 더불어 더 큰 새 희망과 다짐이 깃든 활기있는 날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늘 유혹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 욕심과 내 생각이 살아있는 한 유혹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유혹 자체를 탓하거나 유혹하는 자와 씨름할 일이 아닙니다. 유혹이 두려워서 세상을 기피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유혹을 넘어 하느님의 사랑에 다다라야 합니다.  

유혹이 올 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그저 하느님만을 섬기고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하느님만을 예배하기로 마음 먹읍시다. 하느님 앞에서 욕심을 내려놓읍시다.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욕심이 왜 생기냐 하면 내게 그것이 없으면 안될 것 같다고, 내가 안 챙기면 부족할 것이라고 , 내가 얻기전에 동이 나면 어쩌나하고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풍성하게 주셨고 이미 충분하게 베풀어 주셨고 또 이후에도 얼마든지 풍성한 몫이 남아있는데도 그것을 의심하기에 내가 나서서 내 것을 조금이라도 확실하게 챙겨두려는 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우리 삶을 돌이켜 보십시다. 우리가 욕심낸 적 없는데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욕심내기 이전에 부모형제와 이웃을 주셔서 사랑가운데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 욕심내기 이전에 우리가 먹고 입고 살기에 넉넉하게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지 않으신 것은 당장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필요하다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만을 의심하지 말고,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하느님만을 경배하며 살아갑시다. 하느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이 현실 자체를 감사하고 문제를 하느님께 돌려 맡겨 드리고 순종하며 살아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유혹 속에서도 도리어 풍성한 은총을 발견하고 넉넉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느님, 흙이요 먼지요 재요 티끌에 불과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과 진리의 영을 부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욕심과 어리석음으로 범하는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사랑 안에서 늘 새롭게 일으켜주시고 감싸안아 주시니 또한 감사합니다.

우리가 더욱 겸손히 당신의 은총을 의지하여 살기를 원하여 극기와 절제와 자선과 기도의 생활을 하기로 다짐합니다.

주 성령님,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 가운데 무엇보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가슴에 불붙어 일어나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사순절을 잘 마치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기쁘게 동참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하여 광야에서 단식하시고 기도하시며 고통스런 시험을 이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2. 2. 17 사순1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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