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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1월 20일 (연중 2주일) 강론초 (요한 1:29-42 하느님의 어린양, 예수님의 첫제자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1. 18.

요한 1:29-42

29 다음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30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한 분 계신데 그분은 사실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었다. 31 나도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푼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이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

33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 줄 알아라.' 하고 말씀해 주셨다. 34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35 다음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다시 그 곳에 서 있다가 36 마침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38 예수께서는 뒤돌아 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39 예수께서 와서 보라고 하시자 그들은 따라가서 예수께서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때는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42 그리고 시몬을 예수께 데리고 가자 예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시며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앞으로는 너를 게파라 부르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게파는 베드로 곧 바위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이루신 구원 (요한 1:29-42)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하거니와,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핵심교리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좀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 우리에게 요구되는 믿음이란 것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이미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에 대한 책임(벌)을 질 필요가 없다”는 내용을 다만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일까요?
영계(하늘나라)의 신비한 차원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의 죄값으로 상계 처리하셨고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자는 사후에 영혼을 지내기 좋은 천국으로 들이고 그 사실을 모르거나 부정하는 자는 영혼을 불타는 지옥으로 보낸다고 하는 것이 정말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가르침일까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시고 이루어주신 복음(기쁜 소식)의 진수이고 이것이 과연 영혼구원의 내용일까요?

쉽지 않은 답이긴 합니다만, 한번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감사성찬례(미사)를 통해서 바로 이 예수께서 우리를 대속하신 그 구원사건의 참뜻을 깨닫고 체험합니다. 곧, 기념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너희들과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하여 흘리는 새로운 계약의 피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의 죄와 그 죄를 다루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습니다.

우리의 죄는 하느님을 떠나서, 하느님과 어긋난 관계 속에, 하느님을 거스르며 사는 상태입니다. 십자가 사건이란 하느님께서 그 죄를 해결하시되, 우리를 징벌함으로가 아니라 도리어 심판주이신 하느님 편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희생하심으로써 해결하신다는 놀라운 신비요 역설입니다.

죄 없이 죽임 당하신 예수님의 자기희생은, 하느님의 사랑이 태평하게 인간의 현실을 바라보시는 수준이 아니라 몸소 인간의 죄악과 고통을 함께 겪으시고 아파하시는 차원임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토록 지극한 하느님의 사랑임을 깨달음으로써 우리의 구원은 시작됩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느님께 돌아가기를 결심하고, 하느님과의 회복된 관계 속에서, 성령을 따라 하느님께 순종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남을 희생시켜서 내 욕망을 채우려는 태도를 포기하고, 도리어 나를 희생시켜 사랑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우리의 구원은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사랑 속에, 하느님나라의 삶, 곧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죄와 죽음을 이기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지극한 하느님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 사랑에 우리를 맡기고, 자기희생이 곧 사랑임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구원이 됩니다. ✠ (2005년 1월 16일 강론초)

하느님의 어린양을 따라 이루는 구원 (요한 1:29-42)

 

오늘 요한복음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 첫 제자들이 만나는 장면을 통하여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우리의 받아들임과 뒤따름에 대하여 깊은 교훈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표현합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고대하는 메시야(그리스도)는 강력한 정치력, 군사력, 기적적 능력으로 현실의 고통을 없애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증언하는 일은 화려한 권세나 기적적 권능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와 머무르는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요한 자신이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보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의 죄를 없애는 유효한 방법을 치밀한 법체계를 만들고 강력한 힘으로 감시하고 처벌하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에도 유효합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은 깨우칩니다. 진정한 죄는 율법과 권력이 규정한 죄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일 자체임을! 그 세상의 죄를 없애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께서 겸손과 순종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살고 전하신 그 길뿐임을! 그 길은 인간의 이념이나 방식이 아니라 “성령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일임을!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이 증언한 그 “하느님의 어린양”을 따라갑니다.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말씀에 “머무시는 곳을 알고 싶습니다” 답하며 “와서 보라”는 말씀에 따라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함께 머무릅니다. “우리가 찾던 메시야를 만났소!” 하는 안드레의 고백은 시몬을 예수님께 이끌어 게파 (바위, 베드로)라는 새 이름, 새 관계를 살게 합니다.

우리 삶과 믿음의 목적은 단지 우리 욕망의 성취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그 사랑을 가로막는 죄를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과 희생을 통하여 용서하십니다.
성령은 사랑의 소통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소통입니다. 죄는 성령을 부인하고 사랑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주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룬 이에게 죄는 더 이상 권세가 없습니다. 그것이 복음이고 구원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뒤따르는 길, 죄를 용서받고 악을 물리치며 성령을 따라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길, 그것이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
(2008년 1월 20일 강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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