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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1월 27일 (연중3주일) 강론초 (마태 4:12-23 복음전도시작, 제자들을 부르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1. 26.

마태 4:12-23

12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다시 갈릴래아로 가셨다.
13 그러나 나자렛에 머물지 않으시고 즈불룬과 납달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14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
15 "즈불룬과 납달리, 호수로 가는 길, 요르단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시며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걸어 가시다가 베드로라는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시자 20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갔다.

21 예수께서는 거기서 조금 더 가시다가 이번에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보셨는데 그들은 자기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22 그들은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를 따라 갔다.

23 ○예수께서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나를 따라오너라“ (마태4:12-23)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믿음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의 묘사가 실제 일어난 사실 그대로의 묘사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과학을 신봉하게 된 우리는 사실 그대로의 묘사가 아니면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의 진리는 결코 사실 여부의 차원에 달린 것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메시지”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창조주 절대자께서 피조물 인간들에게 원하시는 삶에 관한 가르침과 선포입니다. 신앙의 진실은 피조물 인간들이 절대자를 경험한 삶의 고백과 증언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러한 신앙의 진리, 신앙의 진실이 어우러진 책입니다.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성경이 영계로부터의 어떤 영적인 사실 정보를 황홀경 속에 비밀스럽게 옮겨 적은 무슨 “바이블 코드”의 책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물론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 진리는 분명 성경기자의 의도와 표현을 통해 사람의 언어로써 전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는 “복음서”라는 자체의 특별한 글의 성격이 있습니다. 복음서는 사실보도가 목적이 아니라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히려는 것이 유일한 목적입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는 주님의 선포는 가끔 종말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전하는 세상심판이 몇년 몇월 몇일로 가까웠다고 하는 식의 정보가 아닙니다. 그 말씀은 인간들이 세운 질서가 아닌 하느님의 다스림 앞에 우리 실존을 불러 세우는 부르심입니다.

  인간적인 비교와 정죄와 위선에 연연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며 있는 그대로의 우리 삶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내세우기보다 정작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살피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는 주님의 말씀에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간 제자들의 순종을 보며 “우리는 왜 그런 대단한 믿음과 지혜가 없을까, 즉시 순종한 그 제자들을 본받아야 할 텐데...” 하고 생각하시는 것은 갸륵하고 순수한 오해^^입니다. 그 장면에는 많은 일들이 생략되어있고 결론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든 주님의 제자들은 “하늘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림”을 위한 주님의 부르심에 이 세상의 가치를 내려놓고 예수의 뒤를 따라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우여곡절 얽힌 모든 삶의 여정 끝에 우리의 묘비에도 다만 한마디가 적히면 족할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생 주님의 뒤를 따랐다.”
마침내 이 한마디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말해줄 것입니다. ✠(2005.1.23 강론초)

“복음을 기쁨으로, 뒤따름을 행복으로!” (마태4:12-23)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게 된 계기는 다양합니다. 그 중 공통적인 내용은 물론 “죄와 고통과 죽음”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결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생, 고통에 시달리는 인생, 너나 나나 알고 보면 참으로 가련한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고통과 죽음이 바로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하느님께 받는 벌이요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고통과 죽음을 피하려면 율법을 잘 지켜야 하고 제의(祭儀)를 잘 바쳐야 하는 것이지요. 대개 우리에겐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심화된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죄의 댓가로 받아 마땅한 그 고통과 죽음의 벌을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다는 것이지요. 그 사실을 믿음으로 시인하는 이들은 모두 죄를 용서받아 고통을 면하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개 우리에겐 바로 그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교우님들께서 스스로의 마음과 생각을 잘 살피시면서 각자 진정한 복음의 내용과 신앙생활의 내용을 정리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이러한 반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힌트가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여전히 두려운 하느님께 대한 비자발적이고 부자유한 복속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예수님을 뒤따르는 인격적인 관계없이 그저 머리로 특정한 교리를 믿어 얻을 수 있는 관념적인 구원에 그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선포로 시작되고 “나를 따라오너라!”는 분부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선포를 두려운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회개하라”는 요청은 “율법을 잘 지키고 봉헌제물을 잘 바치지 않으면 하느님께 고통과 죽음의 벌을 받게 된다”는 위협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내용이라면 복음(福音)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겠지요.
“회개하라”는 선포는 하느님을 고통과 죽음의 심판자로 여기지 말고,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으로 모시라는 깨우침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분부인 동시에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열라”는 부탁입니다.
회개는 감정적인 후회와 뉘우침과 다짐이 그 본질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삶의 방향전환입니다. 새로운 눈뜸이요 귀열림입니다. 새로운 인식과 실천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선포와 분부를 따라 이제 율법과 성전제사는 예수님의 삶을, 그 분의 인격을, 그 분의 영을 따르는 일로 대치됩니다.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분부는 부담스런 동원명령, 징집요청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현실”을 살아가는 구원의 길에 사랑스런 동행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기쁨으로, 뒤따름을 행복으로!” 아는 그리스도인인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2008.1.27 강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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