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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2월 17일 (사순2주일) 강론초 (요한 3:1-17 니고데모와의 대화)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2. 17.

요한 3:1-17

1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2 어느 날 밤에 예수를 찾아와서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 그러자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4 니고데모는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5 "정말 잘 들어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7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8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9 니고데모는 다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0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 11 정말 잘 들어두어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너희는 내가 이 세상 일을 말하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을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다. 14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17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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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으로 거듭나 복음을 살자" (요한 3:1-17)

  구원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고, 영원한 생명은 예수를 믿는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은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일이며 동시에 예수의 삶을 따라 사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사탄에 속한 것이라는 인식이 전부가 아닙니다.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우리의 삶터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삽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부정적인 가능성이지만 우리는 거기에 사로잡혀 살아서는 안됩니다. 베드로도 자신의 가치와 판단을 내세울 때 “사탄아 물러가라”는 꾸중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은총과 진리로 늘 새로운 힘과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영적인 각성, 새로운 눈뜸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이 구원받는 이치를 깨닫습니다. 세상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깨닫습니다. 우리의 삶이 물건의 차원이 아니고 동물의 차원이 아니고 이기적인 인간의 차원이 아니고 영적인 인간의 차원이라는 것을!
 
 인간은 유물론적인 가치로 환원되는 물질덩어리가 아니고,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에 살아남아 진화하는 동물에 그칠 수 없고, 인간중심의 이기적인 문명으로 자연과 다른 사람들을 빼앗고 훔치는 악당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받은 성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몸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세상에 높이 들렸습니다. 그 처참하고 모욕적인 실패, 저주받은 죽음에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났다고 합니다. 인간의 참소망이 거기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의 자기를 모두 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세상의 재력, 권력, 지력의 기준에 비추어 수준 맞는 이들끼리 즐기는 교유나 거래가 아닙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그 사랑을 받아 누리는 일이고, 그 사랑의 힘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사귀고 세워주는 일입니다.

  우리의 성찬은 우리의 위로부터의, 영으로의 거듭남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슨 조직에 속한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끼리 모여 모임을 꾸린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성체와 보혈을 먹고 마시는 일은 매우 우스운 미신이 될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은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이 어떤 의미인지를 도통 알지못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리는 성찬의 풍요로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찬 대신에 맛좋은 요리에 군침을 흘릴 것입니다.  

  실용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분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이루어낸 성취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일은 자기 한 몸 잘 살아보자고 무슨 조직에 가담한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 적지 않은 교회가 마치 성공을 위해 모인 패거리처럼 오해받을 수준으로 전락한 것은 마음 아픈 일입니다. 교회는 자기 성공과 충족을 위한 패거리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복음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파견된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현존하시고 세상의 죄와 고통 가운데 은총과 능력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거듭난 영적인 존재로서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지금 과연 그렇습니까?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은 적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남보다 더 갖고 더 오른 세상적 성공이 마치 복음의 목적인 것처럼 선동하는 이들이 많은 시대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졸업생들을 축하하며 이들을 주님의 사랑에 맡겨 축복하는 기도를 바치고자 합니다. 우리의 학업이 단지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반성하며 살아가는 참된 인간, 세상살이를 꾸려나갈 실력 있는 인간, 더불어 살고 나누며 사는 따뜻한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공부하는 것입니다.

저와 교회는 우리 졸업생들의 성공 여부를 관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졸업하는 교우들의 새로운 학업과 새로운 사역을 “영적인 차원”에서 축복합니다. 졸업생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루하루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로 새로워집니다. 그것이 졸업이고 새로운 시작입니다. 우리 일생은 육신과 정신과 영의 차원을 높여가는 과정입니다. 졸업은 그 과정의 마디를 뜻합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넘치도록 받고 또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진지하고 성실하게 그 축복에 감사하고 응답해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순절은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절기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참된 신앙을 살고 드러내는 삶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가치를 지키며 사는 삶, 영적으로 사는 삶의 가치를 시민들에게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숭례문(崇禮門)은 어이 없이 허물어져 내렸습니다. 이기심과 탐욕과 어리석음과 분노의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가 위로부터, 영으로 거듭난 존재임을 깊이 깊이 깨닫고 성찰합시다. 우리를 위해 자기를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통하여 “영”으로 사는 일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생각해봅시다. 수고로운 학업을 마치고 더 높고 새로운 차원에 발걸음을 내딛는 졸업생들이, 함께 자신과 이웃의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지혜와 용기를 지니고 살아가기를 기원하고 축복합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찬을 통하여 우리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와 교회의 순종과 실천과 선교를 통하여 이 세상을 온전히 구원하실 것입니다. 아멘! (2008년 2월 17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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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과 땅, 영과 육, 성령과 율법 ”

  우리의 구원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우선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 인간성을 묶고 있는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는 일입니다. 성자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성부의 절대적인 사랑은 그 어떤 인간의 죄보다 강합니다. 그 사랑을 진정 믿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사도 바울로가 이해한 주님의 복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구원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추상적인 영혼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인간으로서 모든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그 인격과 삶을 본받는 일이 우리에게 중요하게 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죽음과 부활의 장면들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또한 “실천”으로 일생을 구원의 과정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이미 시작된 구원을, 이제 우리의 삶 가운데 실천으로 계속 이루어가는 구원으로, 마침내 주님께서 완성시켜주실 완전한 구원으로 소망하며 나날이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성령”을 통하여 은총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성자)이신 동시에 철저히 인간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지독한 역설이어서 우리의 머리와 논리로는 사실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주님에 관한 이 역설은 곧 우리 존재와 삶의 이중적인 성격과 구원의 신비에 연결되어 있기에 소중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땅에 갇힌 차원이 아니라 하늘의 차원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약육강식, 생존경쟁의 파충류 같은 차원도 우리 안에 있지만 동시에 더불어 사랑하는 천상의 존재 같은 차원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육체에 갇힌 육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 육체와 이기심을 초월하여 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따라 외적인 질서를 추구하지만 도리어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내적인 질서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힘으로 살 때에 율법으로는 이룰 수 없는 차원의 정의와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주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새로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세례를 통하여 옛사람으로는 이미 죽고, 성령을 따라 사는 새로운 영으로 다시 일어난 이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진실을 매일매일 깊이 기억하고 체험하는 복된 사순절이 되시길 간절히 기원 드립니다. (2005. 2. 20 강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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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육신의 건강과 생명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생명입니다. 그 영적인 생명이 곧 영원한 생명이고 우리는 영으로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해하기 쉬운 것은 영(靈)에 대한 우리의 이해입니다. 어떤 이는 영을 그저 두뇌의 기능에 불과한 것으로 여깁니다. 어떤 이는 영을 육신과 별개의 어떤 불멸하는 독립적 실체로 여깁니다. 모두 불완전한 이해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영”이란 바로 우리의 참 삶이 오직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영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이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신으로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으로도 태어나야 합니다. 곧 육신을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영, 곧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갖는 참된 자기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느님의 계획과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례는 바로 이 깨우침의 표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넘어선 존재라는 것, 그래서 육신은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여기고, 육신에 매여 세상을 따르던 삶에서 방향을 전환하여 이기적 욕심과 어리석음을 벗어버리고 성령을 따라 살겠노라는 것이 바로 회개이고 이 표가 바로 세례인 것입니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고아처럼 버려진 존재가 아니고 창조주 하느님을 신실히 “믿음”으로써의 그 지극하신 사랑을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2002. 2.24 강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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