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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2월 24일 (사순 3주일) 강론초 (요한 4:5-42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2. 23.

요한 4:5-42

5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방의 시카르라는 동네에 이르셨다. 이 동네는 옛날에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곳인데 6 거기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먼 길에 지치신 예수께서는 그 우물가에 가 앉으셨다. 때는 이미 정오에 가까웠다. 7 마침 그 때에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물을 좀 달라고 청하셨다. 8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시내에 들어가고 없었다.

9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께 "당신은 유다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10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시자
11 그 여자는 "선생님, 우물이 이렇게 깊은데다 선생님께서는 두레박도 없으시면서 어디서 그 샘솟는 물을 떠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12 이 우물물은 우리 조상 야곱이 마셨고 그 자손들과 가축까지도 마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우물을 우리에게 주신 야곱보다 더 훌륭하시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13 예수께서는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하셨다.
15 이 말씀을 듣고 그 여자는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16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다. 17 그 여자가 남편이 없다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남편이 없다는 말은 숨김없는 말이다. 18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19 그랬더니 그 여자는 "과연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20 그런데 우리 조상은 저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 드렸는데 선생님네들은 예배 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22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예배 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유다인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24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
25 그 여자가 "저는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저희에게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시겠지요." 하자 26 예수께서는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 때에 예수의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무엇을 청하셨는지 또 그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28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돌아가 사람들에게 29 "나의 지난 일을 다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가서 봅시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알렸다. 30 그 말을 듣고 그들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 모여들었다.31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32 예수께서는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33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누가 선생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을까?" 하고 수군거렸다. 34 그러자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35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온다.' 하지 않느냐? 그러나 내 말을 잘 들어라.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이미 다 익어서 추수하게 되었다.

36 거두는 사람은 이미 삯을 받고 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알곡을 모아들인다. 그래서 심는 사람도 거두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게 될 것이다. 37 과연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거둔다는 속담이 맞다. 38 남들이 수고하여 지은 곡식을 거두라고 나는 너희를 보냈다. 수고는 다른 사람들이 하였지만 그 수고의 열매는 너희가 거두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9 그 동네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여자가 자기의 지난 일을 예수께서 다 알아맞히셨다고 한 증언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40 예수께서는 그들이 찾아와 자기들과 함께 묵으시기를 간청하므로 거기에서 이틀 동안 묵으셨는데 41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42 그리고 그 여자에게 "우리는 당신의 말만 듣고 믿었지만 이제는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 하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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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샘이 되어" (요한 4:5-42)

  벌써 6년 넘게 저는 같은 성경 말씀을 같은 우리 교우들께 거의 같은 내용으로 설교해오고 있습니다. “뻔하고 지겨워요”라는 평을 직접 들은 바는 아직 없지만, 우리 교회 설교의 신선함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사실, 신선함은 기발함이 아니라 생동하는 능력의 문제입니다. 우리 미사의 설교를 통해서 복음의 능력으로 한 주간을 살아가는 힘을 얻으십니까? 아니면 그저 주어진 순서의 주어진 시간이어서 졸음을 참으며 들으시나요?^^ 

공자 선생은 “더불어 말해야 함에도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는다. 더불어 말해선 아니 될 사람과 말하면 말을 잃는다.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잃지도 않고, 말을 잃지도 않는다.” (子曰, 可與言而 不與之言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失言 知者不失人亦不失言)(논어 15장) 말씀합니다. 설교자인 저는 복음의 말씀을 우습게 만들어도 안되고, 귀한 교우들을 잃어도 안됩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교제하고 동시에 성령님을 통하여 청중들과 소통하지 않으면 설교자는 거의 사기꾼에^^ 가까울 것입니다. 저를 위해 많이 기도해주시고 교우님들 스스로를 위해서 또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사마리아여인에게 마실 물을 청하며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시는 예수님을 전합니다. 말씀도 사람도 잃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말씀에 목마른 이들”을 만나시며 필요하고 알맞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감추고 싶은 과거 외에 내세울 것 없는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참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진정으로 예배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에 예수님은 영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셨고 여인은 예수님께 대한 깊은 차원의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 일은 우리 믿음이 계시의 말씀으로 성립됨을 알려 줍니다. 

믿음은 우리가 고민하여 내리는 인간적 결론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 얻게 된 영적인 인식입니다. 우리네 믿음이 과연 말씀의 계시를 통해 그 내용을 채우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묻고 무엇을 찾습니까? 땅 위에서 육신의 필요를 구하는 일이 믿음의 목적입니까? 더불어 누리는 평화와 기쁨과 사랑, 그 더 깊은 영적 행복을 위해 하느님의 뜻과 사랑과 능력 안에 살아가는 일이 믿음의 목적이 아닐까요?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일상에서 순간순간 새로운 기쁨을 경험하십니까? 우리들의 기쁨은 어디서 비롯합니까? 주어진 삶의 조건과 환경이 우리의 기쁨과 우울함을 결정하는 것일까요?

진실은 이렇습니다. 삶의 기쁨과 행복은 바깥의 조건이나 평가에서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만족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샘솟는 샘을 얻어야 합니다. 밖으로 구해서 마시는 물은 곧 우리를 다시 목마르게 합니다.

우리 안에서 샘솟는 샘,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 은혜와 진리의 성령입니다.✠(2008년 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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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으로 참되게 드리는 예배" (요한 4:5-42)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세례”의 참된 의미를 밝혀주시는 말씀이 됩니다.

창세기 2장에는 하느님께서 땅에서 솟은 물로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어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새로운 창조인 세례에 왜 물과 성령이 필요한 지를 말해줍니다. 곧 흙으로 돌아갈 존재인 우리가 물과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구원의 신비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지위 높고 학식 많은 니고데모와는 참으로 대조가 되는 기구한 팔자의 천대받는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을 만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인 니고데모보다도 이 이름 없는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을 알아보는데 더 뛰어났던 바, 이 여인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배”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요한4:24).”  

우리는 예배를 흔히 “장소”와 “형식”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잘 꾸며진 성전에서 잘 갖추어진 의식을 통해서만 하느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배의 본질은 역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문제입니다.  

예배의 장소보다도 예배의 대상이 되는 하느님 그 분이 중요한 것이고 그 분과의 올바른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느님의 기적을 요구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시험하는 일이 아닙니다.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예배를 잘 드린다고 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겸손과 순종으로 응답하는 믿음과 실천이 우리 신앙의 본질이고 우리 예배의 본질입니다. “영적으로 참되게”라는 의미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의 생각으로 제멋대로 하느님을 규정하고, 우리의 욕심으로 제맘대로 하느님께 졸라대는 일일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크고 화려한 성전이 예배의 필수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경건하고 장엄한 예전이 예배의 본질인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 바쳐지는 우리의 믿음과 헌신,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예배의 본질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로마12:1)”✠ (2005년 2월 27일 강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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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어릴 적에는 하느님이 정말 계시냐 아니냐를 두고 많은 논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자라면서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다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문제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살아있고 세상이 이렇게 존재한다면 하느님은 아니 계실 수 없다는 믿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하느님이 계시냐의 여부가 아니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냐, 곧 어떻게 하느님을 섬겨야 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을 섬기려는 마음은 귀하지만 잘못된 섬김은 우상숭배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말씀대로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십니다. 우리의 섬김도 그러므로 영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생각의 대상이 아니고 감정의 대상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영으로 마주 대할 영적인 대상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부적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진리이십니다. 우리를 돌보시고 아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대하는 것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신령과 진정으로(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느님을 달래는 의식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창조와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감사하고 찬양하고 누리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신분을 확인하고 새 힘을 얻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적인 파트너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영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2002년 3월 3일 강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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