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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7년 9월 1일(토) 강론초고 ( '열심'보다 중요한 '감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9. 4.
'열심'보다 중요한 '감사'


저는 겁이 많습니다. 아직도 이런 일 저런 일에 근심과 걱정, 두려움이 많습니다.

예전에 대학 졸업후 1년을 그냥 놀았습니다. 세상에 나가기가 겁나서요,
그리고는 신학교를 들어갔습니다. 험한 세상에 비하면 얼마나 평화로운 곳인가요, 신학교는.
생각대로 안온하긴 했지만 현실은 분명 ‘빌어먹는’ 삶이었고 이대로 평생 빌어먹는 인생이 되고 말 것 같다는 생각은 참 우울하고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저는 “빌어먹는 삶”을 기쁘게 누릴 줄 알게 되었고 그 일에 얼마나 교우들의 크나큰 사랑이 뒷받침되는가, 그 근저에 얼마나 놀라운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하는가를 깨닫고 있습니다.
만일 “너 이만한 처우를 해줄터이니 이만한 실적을 내라”는 식의 요구가 교회공동체로부터 제게 주어진다면
 저는 더 이상 그 교회공동체에 미련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른바 청빙제에 이런 불순한^^ 동기가 스며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헨리 나웬 신부님의 표현이라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doing nothing, being useless)” 가 실은 신앙인에게 허락된 인간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목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런 신앙인의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필멸의 죄인이 절대의 은총으로 값없이 (값싼게 아니라, 신의 자기희생이라는 무한한 값을 치름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의 신비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지요.

좌우간 그 때 그 젊은 신학생은 그 빌어먹는 느낌의 비참함을 이기기 위해 용기를 내어 신학교를 그만두고 취업을 했습니다.
세상은 엄청난 속도와 파워로 돌아가고 있었고, 제 주제, 제 가치관과 성격으로는 도무지 잘나가는 주류에 속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도 저 멀리 교회 안에서 세상을 그저 손가락질하며 실제로는 세상의 힘에 실려 돌아가는 교회의 처지를 애써 외면하려드는 비현실적인 신앙인은 아니라는 자부심으로 몇 해를 버티었고, 실제 그다지 못나간^^ 편도 아니었습니다만, 제 마음은 전혀 편안하질 않았습니다.

결국 다시금 교회의 성직을 향해 돌아오면서 내리게 된 결론은
세상살이는 무슨 일을 하든지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인간”이 무엇에 만족하고 얼마나 감사하는가 하는 거였습니다.
세상에서 충분히 별 볼일 없는 자신을 확인하고 나니,
교회에서 별 볼일 있는 인간이 되겠다는 욕심은 참으로 웃기는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까지 교회공동체 안에서 별 볼일 없는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사목자의 본분이라고 궤변(詭辯)을 늘어놓는 인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는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두려움 없이 뜨거운 열정으로” 사는 것이 참된 인생임을 가르쳐주시니
저 같이 악하고 게으른 인간에게는 정말 찔리는 말씀입니다.

곰곰이 변명을 생각해봅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의 능력대로 일을 맡기신다고 하십니다.
능력이 있는데도 일을 피하는 것, 능력이 없으면서도 일을 찾는 것 둘 다 문제일 터입니다.
허락된 능력을 분별하고 맡겨진 일을 직면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체로 무능하지만 나름대로 어떤 부분에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맡겨지는 일은 가능한 한 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무엇보다 비유에서 게으른 자의 변명은 “하느님이 두려워서” 였습니다.
제가 게으른 이유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해서^^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참 뻔뻔한 변명입니다. 도대체 어떤 야단을 맞아야 정신차리려나?^^)

무엇보다 신앙은 '감사'를 배우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지만 저 역시 알고 보면 참 불쌍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가진 것, 제가 가진 가능성을
쓸데없는 '불평불만'으로 잃어버리고 날려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저를 점점 더 넉넉하게 합니다.
저의 가장 큰 관심은 저 자신의 자유와 성장입니다.
공연한 불평으로 하느님을 악하게 만드는 악하고 어리석은 자는 아니고 싶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단순히 인간적인 “열심”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깨닫고 신뢰하고 “감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지요.
나의 현실 가운데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참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떠들썩한 성공을 이룬 삶이 아니라 그저 평범하고 조용한 삶이어도 하느님께 적지않은 칭찬을 받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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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1일 감사성찬례 성서말씀

1데살 4:9-12
9 교우를 사랑하는 일에 관해서는 이 이상 더 쓸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직접 하느님께로부터 서로 사랑하라는 교훈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10 그 교훈을 실천해서 마케도니아 온 지방에 있는 모든 교우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더욱더 그렇게 하시기를 권고하는 바입니다.
11 그리고 내가 전에 지시한 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각각 자기의 직업을 가지고 자기 손으로 일해서 살아가십시오. 12 그러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서도 존경을 받게 되고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마태 25:14-30
14 "하늘 나라는 또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었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돈 다섯 달란트를 주고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16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17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18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가서 그 돈을 땅에 묻어두었다.
19 얼마 뒤에 주인이 와서 그 종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주인님, 주인께서 저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고 말하였다.
22 그 다음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와서 '주인님, 두 달란트를 저에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래서 주인은 그에게도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고 말하였다.
24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와서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그대로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6 그러자 주인은 그 종에게 호통을 쳤다.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인 줄로 알고 있었다면 27 내 돈을 돈 쓸 사람에게 꾸어주었다가 내가 돌아올 때에 그 돈에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28 여봐라, 저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아라.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대한성공회 최초의 수녀선교사 노라(18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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