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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나눔

캔터베리 대주교는 어떤 사람이며 성공회 교우들은 그를 어떻게 보나요?

by 분당교회 2018. 9. 9.

캔터베리 대주교는 어떤 사람이며 성공회 교우들은 그를 어떻게 보나요?


597년 그레고리우스 대종은 영국 제도 남동쪽에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수사를 파송하여, 현지 앵글로 원주민들, 곧, 그레고리우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흰 피부의 ‘천사’angel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게 했습니다. 켄트에 상륙하여 캔터베리로 이동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에셀베르트 왕의 왕비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워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초창기부터 브리타니아에 전파되었으며 니케아 신경이 만들어지기도 했던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 두 명의 대표가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아우구스티누스가 발견한 것은 그에게 친숙했던 로마 전통이 아닌 지역 켈트 문화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교였습니다. 그레고리우스 대종과 이 문제를 논의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가 발견한 가장 좋은 것과 자신이 가져온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취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잉글랜드 교회가 공식적으로 탄생하였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첫 대주교가 됩니다. 



이후 104명이 캔터베리 주교좌를 계승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불후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은 헨리 2세에 대항하다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순교하였습니다. 토머스 크랜머는 헨리 8세 치하에서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을 시작하고 공동기도서를 저술했으며 메리 여왕의 명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캔터베리 교구의 주교로서, 나아가 잉글랜드 교회의 대표 관구장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종교개혁 시기에 잉글랜드 교회가 로마와 결별한 이후에는 잉글랜드 성공회를 대표하는 주교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1800년대 후반부터는 점차 확장하는 교회 집단, 곧 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저스트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


주목해야 할 점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성공회의 교황이 아니라 “동등한 가운데 으뜸”primus inter pares으로, 세계 성공회의 일치의 가시적 상징이자 도구라는 것입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세계 성공회의 제1대변인과 대사의 역할을 수행하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직접적인 권한은 단지 잉글랜드 성공회에만 행사할 수 있습니다(그 권한 또한 잉글랜드 북부 관구를 관할하는 요크 대주교와 공유합니다). 각국 관구 성공회는 관구장 주교를 관구 교회의 으뜸으로 인정하지만 동시에 캔터베리 대주교를 성공회의 유산과 지속적인 어머니 교회라는 관계의 살아 있는 증인으로 존중합니다. 


[생각해봅시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교황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중요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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