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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광야의 외침

by 분당교회 2016. 12. 4.

광야의 외침

 

성서에서 광야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명령을 듣고, 과거의 낡은 삶을 버리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곳입니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으로 가는 과정에 광야가 있었습니다. 곧바로 가면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길임에도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방황했습니다. 낡은 종살이의 노예근성과 죄를 씻는데 40년이라는 시간과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걸핏하면 하느님과 모세를 배반하기가 일쑤였습니다. 때로는 이집트 종살이가 차라리 낫다고 하면서 왜 우리를 이곳으로 끌어내 왔느냐고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노예근성이 뿌리째 뽑히고 하느님이 가르쳐 주신 율법에 따라 새 삶을 살게 되기까지 40년의 광야의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또 창세기에서 야곱이 광야를 홀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곳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잘 때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할 때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면서 수련하셨습니다. 이렇듯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계시의 장소이기도 하고, 새 삶으로 거듭나는 회개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탄생을 이루는 곳입니다.



예수께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전에 광야에서 홀로 외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아마도 이 때 당시에 광야에서 수도하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세속의 탐욕과 거짓이 가득 찬 중심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살면서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보면 철저히 아웃사이더이고, 가난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 강 부근의 사람들이 그의 앞에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축복과 은혜가 넘치는, 듣기 좋은 달달한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물질적 풍요와 건강과 출세를 기원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외롭게 외쳤습니다.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 구세주가 나타나는 그 시대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그 시대를 준비하는 첫째는 회개와 세례를 통해 거듭나는 것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살았다면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 중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는 입으로만 고백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삶과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 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말대로 회개해서 세례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혹시 모를 심판을 피하고 싶었을 뿐이고 세례를 증표로 삼고자 했습니다. 거짓 회개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권력과 부와 명예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거듭 사과 성명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온 국민이 그 사과를 진심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고백하지도 않고 대충 얼버무리고 위기를 피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회개에 대한 행실이 전혀 보이지 않고 다른 술수를 품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준비의 두 번째는 겸손입니다. 요한은 스스로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고, 그분은 나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는 사람이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겸손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맞이하고 준비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태도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엔 가난한 자들의 재판을 정당하게 해주고, 흙에 묻혀 사는 천민들의 시비를 바로 가려주리라고 합니다. 정의로 허리를 동이고 성실로 띠를 띨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쳐도 아무 상처가 나지 않습니다.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에서 품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 모두가 회개해야 합니다.


(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12 4,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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