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이방인(異邦人). 글자 그대로 풀이한다면 다른 나라 사람, 또는 다른 지역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에 대해서 우리는 단순히 다른 지역, 또는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르기 때문에 아웃사이더 또는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이라고 해야 더 그 뜻이 와 닿는 것 같습니다. 나아가서 다르기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이나 사회공동체에서 배제된 사람까지도 포함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성서에서 이방인의 존재는 특별합니다. 아마도 유다인들의 순혈주의와 율법 때문에 더욱 이방인은 경멸과 천시 또는 경원의 대상으로 존재합니다.
예수님마저도 한 여인의 간절한 소망을 들으시면서 ‘강아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시로 페니키아 여인이 자신의 어린 딸이 마귀가 들렸으니 제발 쫓아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거절하십니다. 이방인에 대한 유다인들의 일반적인 관념이며 이렇게 표현을 해도 문제될 것이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형적인 배제와 경멸의 대상으로서 이방인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하면서 끈질기게 예수님의 자비를 갈망합니다. 예수께서는 ‘옳은 말이다.’라고 답하십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하신 ‘옳은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여인과 딸도 존중받아야 할 하느님의 자녀라고 생각하신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 여인의 믿음과 간절한 소망의 무게는 유다인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하는 것은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같은 것이라고 여기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자비는 혈통과 율법의 벽을 뛰어넘기에 그 여인의 딸은 완전히 회복됩니다.
(시로 페니키아 여인과 예수님)
마르코 복음에서는 이 기사에 뒤 이어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치십니다. 귀 먹은 반벙어리 역시 그 당시 사회에서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죄인 취급 받을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로부터 냉대와 천시를 받는 존재였습니다. 사회공동체에서 배척당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따로 불러내어 ‘에파타’ 즉 ‘열려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병자는 다시 회복되고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 취급당하는 것은 삶을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항상 고립된 심정으로 살아야 하고 가치가 없는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자신의 인생을 추구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주변에는 많은 이방인들이 존재합니다. 외국인 노동자, 동성애자, 탈북인들.... 그러나 가장 큰 고질적인 문제는 이 시대에 절벽 같은 현실 앞에서 꿈도 인생도 포기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청년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있습니다. 길어야 일, 이 년, 짧으면 몇 개월을 일하고 또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하는 불안한 삶 속에서 미래를 기약할 수도 자신의 가치를 실현해 볼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냉정하게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해서 팔고 그 가치가 끝나거나 장기채용의 부담이라는 짐으로 여겨질 때는 여지없이 떠날 수밖에 없는 ‘미생’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이방인을 우리 사회가 확대재생산하고 있다는 하는 점입니다. 아마도 일반 시민들이 신랑감, 신부 깜을 고를 때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를 따지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라고 한다면 이미 일상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알베르 까뮈의 문제작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살인죄로 재판을 받습니다. 알제리인과 결투 상황에서 그의 손에 쥐어진 칼에 뜨거운 태양 빛이 반사되어 날카롭게 자신을 찌를 때 뫼르소는 권총을 발사합니다. 그리고 재판 중에 그는 태양 빛 때문에 죽였다고 진술합니다. 검사는 이 이상한 주인공이 어머니 장례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어머니의 나이도 모르는 사람이기에, 또 장례가 끝나자마자 해수욕을 했다는 이유로 계획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합니다. 뫼르소의 의견을 묻지는 않고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부조리한 현실에서 삶을 잃어버린 이방인을 나타낸 것입니다. 급변하는 현대사회, 특히 미친 듯이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까뮈가 냉철하게 바라본 인간 실존의 상실을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이방인들은 그들 스스로 이방인이 되지 않습니다. 사회와 이웃들이 ‘포용’, ‘관용’, ‘자비’를 잃을 때 나타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야말로, 그리고 시로 페니키아 여인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야말로 이방인의 굴레를 씌우고 또 그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원할 것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9월 6일 연중 23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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