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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성서통독강좌 8 - 총정리 2 / 이주엽 신부

by 푸드라이터 2013. 1. 20.

생수의 강 : 분당교회 성서통독강좌 8 _ 총정리 2 

작성 : 이주엽 신부


※ 지난 시간 구약의 핵심으로 하느님은 I AM, 즉 ‘참나’라 할 수 있다는 점을 짚었다. 이번 시간에는 신약의 핵심으로 그 I AM은 우리 안의 ‘성령’이심을 짚는다.


■ 산상수훈(山上垂訓)/진복팔단(眞福八端) – 참 행복의 여덟 가지 단서. 성서 안의 성서.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 사단(四端)은 참마음이 들어있음을 알게 하는 네 가지 단서(端緖). 단서란 ‘바른 실마리’ 즉 문제해결의 첫 단추. 황금률의 여덟 단서.

■ 황금률 – 인간사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 교회-사회-세상이 다 여기 입각해야. 교회는 황금률을 행하는 사람들의 거룩한 모임.

■ 루가 11:13 “더 좋은 것 곧 성령”


위의 셋을 연결 지으면 “인간은 성령을 따라 살 때 비로소 참되게 황금률을 행할 수 있으니 이때 삶의 정황에 따라 이런저런 여덟 가지 단서가 나타날 수 있으나 뿌리는 같다”는 게 된다! 




1. 마음이 가난한 사람 – 마음의 내용물이 많지 않음, 즉 에고 마음이 적고 욕심이 없음을 말함. 진정한 금식은 마음의 금식. 관상기도란 마음, 특히 생각마음을 벗어나는 것.


2. 슬퍼하는 사람 – 그냥 슬픈 게 아니라 세상에 황금률이 없어 슬퍼하는 사람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악을 미워하는 마음과 같다.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선을 행합시다, 꾸준히 계속하노라면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갈라 6:9).


3. 온유한 사람 – 온유(溫柔) 즉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움, 마음에 평화와 순수함이 있는 사람. 관상적 마음을 지닌 사람이 진정 온유하다. “땅을 차지할 것”이란 시편의 표현(37:11). “보잘것없는 사람은 땅을 차지하고” 악인은 결국 망하지만 진정 남는 것은 온유한 사람. 


4.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 세상에 정의가 없어 불만스러운 사람. *시비지심(是非之心) 즉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 오늘날 교회는 이것이 부족하다.


5. 자비를 베푸는 사람 – 자비란 ‘남을 사랑하고 가엽게 여기는’ 마음 즉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말한다. 다 내면에 참나를 모신 사람들의 모습을 가리킨다.


6.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 마음의 텅 빔 즉 생각과 감정과 느낌이라는 마음의 내용물이 없는 순수의식의 경험(관상적 의식)이기도 하고 그래서 에고가 아닌 참나를 따를 수 있는 양심적 마음이기도 하다. 성령에 입각하지 않는 마음은 무얼 해도 진정으로 선량하지 않다.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마르 10:18)  


7.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 어느 자리에 가든 평화의 일꾼, 화해자, 통합자가 되는 사람. 사양지심(辭讓之心) 즉 겸손히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 입각하는 사람. 공동선을 주장하지만 마음에 황금률이 없으면 이럴 수 없다.


8.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 - 내가 손해를 볼지라도 옳음을 추구하는 사람. 이익을 따르기보다 참나를 따르고 있다는 단서. 그 이면이 남을 자신처럼 대하려는 황금률 마음이 있다. 


9.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 예수님 당시 제자들의 처지. 깊이 들여다보면 성령 즉 참나를 따르며 그 단서를 여덟 가지로 드러내는 사람들을 거짓 종교인들, 에고로 살아가는 소인배들은 견딜 수 없어 한다. “옛 예언자들도 박해를 받았다!”


■ 무지한 신앙, 맹신이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참나 즉 성령에 입각하여 참된 단서 혹은 열매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기준에서 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 세상의 소금과 빛 – 짠 맛? 성령에 입각하여 살길 구해야 한다. 사도 바울로에게는 영적인 인간과 육적인 인간 둘 밖에 없다. 곧 참나를 따르는 사람 vs 에고를 따르는 사람이다. 참나를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쓸모가 없다. 지나 내나. 모본의 힘으로 감화. 

■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 아버지를 찬양케 - ‘아, 사람이 저렇게 살 수 있구나!’ 하면서 하느님이 계시구나 한다. 예수님의 빛이 지금 2천 년 넘게 비치고 있다. 

■ 율법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 율법은 하느님의 명령인데 하느님의 마음을 품어야 가능하고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참 양심의 나라. 행위는 바리사이보다 못하면 안 된다. 


하느님은 죄를 보면 분노하실까, (은혜롭게!)묵인하실까? 성서는 하느님의 진노를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하면서 하느님의 분노, 참나에서 비롯된 의분(義憤)을 드러낸다. 천인공노(天人共怒)란 표현.


예수님의 방편적 가르침: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나도 에고는 선하지 않다. 에고는 이기적이고 두려워하며 불안하고 결핍감에 늘 시달린다. ‘나’ 떼면 순수한 마음은 곧장 공정해지고 화평해진다. 자기를 부인해야, 나를 내려놓아야 아버지, 순수의식, 근원의식을 만난다. 어떤 때는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 성령 충만할 때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상황과 상대방의 수준에 따라 가르침을 달리 하신 것. 나 정도면 선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부자청년)에게는 완전해지라고. 


결국 그리스도인 생활이란 자주 성령 안에 들고 에고가 그 참나에 봉사하게끔 길들이는 길이다. 돈오점수(頓悟漸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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