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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11월 15일 (연중 33주일) 강론초 (마르 13:1-8)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2.


2009년 11월 15일 연중 33주일 성서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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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 12:1-3

1. 그 때에 미가엘이 네 겨레를 지켜주려고 나설 것이다.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그런 때라도 네 겨레 중에서 이 책에 기록된 사람만은 난을 면할 것이다. 2. 티끌로 돌아갔던 대중이 잠에서 깨어나 영원히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모욕과 수치를 받을 사람도 있으리라.
3. 슬기로운 지도자들은 밝은 하늘처럼 빛날 것이다. 대중을 바로 이끈 지도자들은 별처럼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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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 10:11-25

11. 사제가 날마다 성전에서 예배의식을 거행하며 같은 희생제물을 자주 드리더라도 그 제물들이 결코 죄를 없애버릴 수는 없습니다. 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오직 한 번 희생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죄를 없애주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효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13.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 아래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14. 그분은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거룩하게 만드신 사람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해주셨습니다.
15. 그리고 성령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며 증언해 주셨습니다. 16. "'그 날 이후, 내가 그들과 맺을 계약은 이것이다.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마음에 심어주고 그들의 생각에 새겨줄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17. 그리고 나서 "나는 이제 결코 그들의 죄와 잘못을 마음에 두지 않으리라." 하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18. 죄를 용서받았으므로 이제는 죄 때문에 봉헌물을 바칠 필요는 없게 되었습니다.1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예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는 마음놓고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0.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그 휘장은 곧 그분의 육체입니다. 21.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사제가 계십니다. 22. 우리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서 나쁜 마음씨가 없어지고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씻겨 깨끗해졌으니 이제는 확고한 믿음과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23. 또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분은 진실한 분이시니 우리가 고백하는 그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 24. 서로 격려해서 사랑과 좋은 일을 하도록 마음을 씁시다. 25. 그리고 어떤 사람들처럼 같이 모이는 일을 폐지하지 말고 서로 격려해서 자주 모입시다. 더구나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아는 이상 더욱 열심히 모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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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13:1-8

1.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 나오실 때에 제자 한 사람이 "선생님, 저것 보십시오. 저 돌이며 건물이며 얼마나 웅장하고 볼 만합니까?" 하고 말하였다.
2. 예수께서는 "지금은 저 웅장한 건물들이 보이겠지만 그러나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 예수께서 성전 건너편 올리브 산에 앉아 성전을 바라보고 계실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아가 따로 찾아와서 4.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일이 다 이루어질 무렵에는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5.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6. 장차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떠들어대면서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7. 또 여러 번 난리도 겪고 전쟁 소문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황하지 마라. 그런 일은 반드시 일어날 터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8. 한 민족이 일어나 딴 민족을 치고 한 나라가 일어나 딴 나라를 칠 것이며 또 곳곳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흉년이 들 터인데 이런 일들은 다만 고통의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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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소외된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주시며 억눌린 이들을 해방시켜 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로 하여금 고난 속에 있는 이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하느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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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말 구원의 이야기 (마르 13:1-8)

시간이 참 빨리도 흐릅니다. 2009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교회력으로는 이제 한 해를 거의 마무리하는 시점입니다.

오늘 복음 성경은 종말의 이야기입니다. 종말에 대한 성경의 관심은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지구 종말설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지구종말설은 무슨 마야의 달력을 이야기하던 소행성충돌을 말하던 가치 없는 사기성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뭐가 걱정이지요? 삶의 터전인 지구가 완전히 멸망하는데 구태여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은 당위일까요? 욕심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은 심판과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철저히 신앙적인 세계관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종말론은 언제 어떻게 심판이 있다고 하는 시간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이 우리를 구원하는가, 곧 우리에게 무엇이 궁극적인 가치인가를 인식하는 문제입니다. 절대로 시한부종말론 따위에 속지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통한 죄사함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유대인들은 믿었습니다. 화려한 성전은 가난한 과부가 마지막 동전 두 닢까지도 기꺼이 바치게 하는 내면화된 가치체계의 총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웅장한 성전이 돌 하나도  제 자리에 남지 않게 무너지고 말리라고 말씀합니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성전으로서 예수님 당신의 현존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들 신자의 몸이 곧 주님의 성령을 담지하는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실존이 가능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알파요 오메가, 시작과 끝입니다. 종말론은 바로 시작과 끝에 대한 한 차원 깊어진 깨달음입니다.

신앙을 통해, 말씀과 성사를 통해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현존경험은 우리의 모든 가치판단과 실천을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절대적인 기준에 비추며 세상을 살아가도록 합니다.

여러 가지 전쟁과 재난의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인 동시에 묵시문학이라는 표현양식입니다. 본질적인 강조점은 심판이 곧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심판이란 우리의 모든 가치는 궁극적 가치 앞에 상대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 인간의 모든 가치와 질서는 상대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상대성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절대성을 경험하는 전제가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참여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상대화하고 보다 더 높고 깊은 하느님의 차원을 우리 삶에 맡기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여 세상의 변화와 고난을 견디는 것, 쉽게 엉뚱한 종말론에 속지 않는 일, 그것이 우리의 오늘의 신앙입니다. 순간순간 변하고 결국은 끝장날 수 밖에 없는 삶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모든 순간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를 절대로 신뢰하는 일, 그 “내어맡김”이 바로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2009.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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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랍고 두려운  “하느님의 나라” (마르 13:1-8)

지난 주일에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주님의 첫 선포에 관하여,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르신  “사람 낚는 어부”의 소명에 대하여 말씀을 전했습니다.
1독서(구약)에서 읽은 “사렙다의 과부에게  엘리야가 행한 기적 이야기”가 다소 설교하기에 편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래도 복음서를 본문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씨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다소 교만스런^^ 마음으로 설교를 준비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면서, 또 전하고 나서 저는 매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설교자로서의 저는 스스로 먼저 설득되지 않는 말씀은 교우들께도 드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느님의 나라의 다가옴”을 통해 진정한 설레임과 기쁨을  느껴야 한다는 저의 메시지는 머리로 지어낸 논리를 억지로 교우들께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사실 그것은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들의 것이고, 21세기의 한국인인 우리에게는 다소 거리가 먼 개념인데 그 의미를 충분히 살피고 전하지도 않았으면서 그저 “하느님 나라”라는 말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렇다면 그런 줄 알라“는  폭력적인 태도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한참의 반성 끝에 문제의 본질은 저의 어리석음과 부족한 성찰 자체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묵상한 덕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른바 묵시문학적인 표현을 빌려 세상의 종말(마지막)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더욱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이천년 내내 경험한 일이기도 하고 어쩌면 이천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빗나간 예언인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석한단 말입니까?
제가 성경의 본문 앞에서 생각을 내려놓고 침묵하지 않을 수 없을 때 그 본문은 다른 메시지를 들려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는 도무지 우리가 머리를 굴려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온 몸으로 그 나라의 다가옴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저의 해석으로 하느님 나라를 파악하고 설명하려는 노력이 실패하는 것은 단지 저의 노력부족 때문이 아니라 본래 “하느님 나라”가 신비 그 자체로서 당연히 해석불가한 일이었다는 것이지요.


하느님나라의 도래는 경제성장에 바탕을 두고 10년 계획에 따라 복지사회가 차차 이루어지는 그런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한다는 것은 무슨 기분좋은 황홀경에 빠지거나 무슨 신통력을 얻게 되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 앞에서 “인간의 나라”는 끝장나야 하고, “하느님의 현존” 앞에 우리는 “죽음”을 기꺼이 각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종말과 죽음은 언제 어떻게 일어나느냐의 정보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질서는 시간의 흐름 속에 절대적일 수 없고 인간의 운명은 하느님 앞에서 독립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할 수 없이 변하고 끝장날 수 밖에 없는 삶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모든 순간 하느님을 절대로 신뢰할 수 있는가가 구원의 본질이요, 그 “내어맡김”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2006.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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