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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3월 8일 (사순 2주일) 강론초 (마르 8:31-38 주님의 수난예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3. 8.


2009년 3월 8일 사순 2주일 성서말씀
 
창세 17:1-7, 15-16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되던 해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신이다. 너는 내 앞을 떠나지 말고 흠없이 살아라. 2 나는 너와 나 사이에 계약을 세워 네 후손을 많이 불어나게 하리라."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4 "내가 너와 계약을 맺는다. 너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 5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리니, 네 이름은 이제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라 불리리라. 6 나는 너에게서 많은 자손이 태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왕손도 너에게서 나오게 하리라. 7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느님이 되어주기로, 너와 대대로 네 뒤를 이을 후손들과 나 사이에 나의 계약을 세워 이를 영원한 계약으로 삼으리라.
15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분부하셨다. "네 아내 사래를 사래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그의 이름은 사라이다. 16 내가 그에게 복을 내려 너에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리라. 그에게 복을 내려 많은 민족의 어미가 되게 하고 그에게서 민족들을 다스릴 왕손이 일어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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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2:23-31

23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찬미|하여|라. ∥ 야곱의 후손들아, 주님께 |영광|돌려|라.

○ 이스라엘 후|손들|아, ∥ 주 앞에 모두 다 머리를 |조아|려-|라.
24 내가 괴로워 울부짖을 때 귀찮다 외면하지 않|으시|고 ∥ 탄원하는 소리 |들어|주셨|다.
25 큰 회중 가운데 주님을 찬송함도, 주께서 허락하|심이|니, ∥ 주님을 경외하는 무리 앞에서 나의 서원 |지키|리-|라.
26 가난한 사람 배불리 먹고: 주님을 찾는 사람은 그를 찬송|하리|니 ∥ 그들의 마음 길이 |번영|하리|라.
27 온 세상이 주님을 생각하여 돌|아오|고 ∥ 만백성 모든 가문이 그 앞에 |경배|하리|니,
28 만방을 다스리시는 |주님|께 ∥ 모든 왕권이 |있으|리-|라.
29 땅 속의 잠든 이들도 주 앞에 엎|드리|고 ∥ 먼지 속에 내려 간 자들도 주 앞에 머리를 |조아|리리|라.
30 이 몸은 주님 덕분에 살고: 오고 오는 후손들이 그를 |섬기|며 ∥ 그 이름을 세세대대로 |전하|리-|라.
31 주께서 건져주신 이 모든 |일들|을 ∥ 오고 오는 세대에 길이 |전해|주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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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4:13-25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세상을 물려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다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에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14 만일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상속자가 될 수 있다면 믿음은 무의미하게 되고 그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15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도 없게 됩니다. 법이 있으면 법을 어기게 되어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마련입니다.

16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상속자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며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곧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에게 그 약속을 보장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성서에 "내가 너를 만민의 조상으로 삼았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18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9 그의 나이가 백 세에 가까워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또 그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도 이제는 아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끝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굳게 믿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어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하느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23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다." 하는 말씀은 비단 아브라함만을 두고 하신 것이 아니라 24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들까지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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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8:31-38

31 그 때에 비로소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32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33 그러자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시며 꾸짖으셨다.
34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35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37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또는 마르 9:2-9]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 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고 3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그보다 더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났다. 4 그런데 그 자리에는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서 예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5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을 모시고 하나는 모세를, 하나는 엘리야를 모셨으면 합니다." 하고 예수께 말하였다. 6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겁에 질려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엉겁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7 바로 그 때에 구름이 일며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8 제자들은 곧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예수와 자기들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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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수난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신실한 믿음으로 주께서 보여주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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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마르 8:31-38)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얼핏 복음(기쁜소식)이 아니라 우울한 소식처럼 들리기 쉽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이 말씀에 제자로서의 부담감을 심히 느끼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분명 심오하고 아름다운 복음입니다.

우선 이 말씀은
‘누구든지’ 해당되는 말씀이기에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나만 손해보는 경우는 없습니다. 인간의 심리가 “유독 왜 나만 이런가?” 생각이 들면 더욱 우울해지기 마련인데 일단 모든 인간이 같은 처지인 것이니 혼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따르려면’
이라는 제안은 엄청나게 좋은 보상,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인생 대박의 길이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일생 예수님을 따라 산 결과가 별 볼일 없다면 누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지극한 행복을 살아서 누릴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하느님을 뵈옵고 칭찬을 듣는 영광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걸 못 믿으며 신앙생활을 한다는 건 앞뒤가 안맞지요.

‘자기를 버리고’
라는 말씀이 좀 심각한 느낌을 주긴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곧 ‘자기’를 매우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 말씀은 두렵거나 부담스런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더러 우리 스스로를 망쳐야 한다고 하시는 말씀일 리 없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우리 스스로가 우리 힘으로 잘 살아보겠다고 우리를 들볶으며 하게 되는 이런저런 욕심, 걱정, 근심, 두려움, 콤플렉스, 자기혐오, 어리석은 생각들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우리 삶을 맡기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전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를 안버리면’ 살아서는 아둥바둥 고통의 연속이요 죽어서는 억울하게 떠도는 혼이 되기 십상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는 말씀에 우리는 당황합니다. “아니, 없애주셔도 시원찮을 십자가를 도리어 지고 따라오라니 어인 말씀인가?” 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의심하게 됩니다. 이는 보통 우리가 ‘십자가’를 ‘재수없는 불행한 사건’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우리 인생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을 배우기 위해” 맺고 책임지게 되는 현실의 모든 관계를 상징합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우리 인생의 내용 자체가 없게 됩니다. 순탄하여 편할지는 몰라도 공허하고 허무한 인생이 되는 것이지요.

십자가는 하느님의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이 곧 부활로서 주님의 사랑,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듯이 우리 몫의 십자가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죄악을 이기고 성숙하여 거룩해지는 우리 인생 자체인 것입니다. (2009.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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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마르 8:31-38)


오늘 복음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말씀인 동시에 가장 따르기 어려운 말씀이며 그래서 짐짓 우리가 외면하려 하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의 동기는 무엇보다 우선 이 세상에서 자기(축복)를 챙기고 혹시 모를 십자가(고난)를 피하려는 마음이지 그 반대는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의 위대한 고백에도 그런 동기가 숨어있었다고 성서는 전합니다.

으뜸 제자 베드로도 가차없이 예수님의 꾸지람을 들었거늘, 행여 우리라고 그냥 넘어가시겠습니까? 어물쩍 어떻게 할 생각 말고 분명 복음서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주님의 이 말씀을 확실히 들었노라고 시인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아뢰길 “실은 제가 그다지 성경을 열심히 읽는 편이 아니고 또 복잡한 얘기는 골치 아파서, 그저 예수님 믿으면 천당, 안 믿으면 지옥, 그리고 말 잘 듣고 많이 바치는 믿음의 분량만큼 축복을 받게 된다는 진리만 배웠습니다...” 하여도 전혀 변명이 되질 않음을 애초에 각오해야 합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무슨 뜻일지 전혀 감을 못 잡는 분은 없을 터입니다. 실천이 어렵지, 이해가 어려운 말씀은 아니니까요.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제 콧대를 꺽고 고개를 숙이는 일입니다.
자기(自己)의 자(自)라는 한자는 본래 코(비,鼻)에서 비롯되었답니다. 콧대를 높이고 고개를 뻣뻣이 세워서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은 불가능하겠지요.

그리고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곧 자기 소유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말로 자기를 아무리 버린다 한들, 정작 자기가 가진 것에 집착하고 있으면 그건 자기를 못버린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도 결국 내 것일 수 없음을 깨달으면 세상에 내 것이라고 고집할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되고,  주어져 누릴 때는 감사하고 선용하며, 잃으면 담담하고 시원해할 뿐입니다.

또한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을 자기로 여기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사무16:7) 곧 겸손하고, 가난하고, 영적인 인간만이 참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는 우리 삶에서 불행하게 마주치는 우발적 골칫거리를 일컫는 이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 몫의 불가피한 삶의 문제로서, 마시지 않고는 결코 치워질 수 없는 잔입니다. 그 십자가에는 ‘나 자신’과 또 ‘내가 행복을 빌어주어야 할 사람들’의 삶의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는 진리를 알 수 없고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2006.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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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몸소 행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우리가 원하고 하려드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모순 없이 일치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사이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또한 우리들의 믿음과 기도와 실천의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구세주(메시야, 그리스도)이신 동시에 온전한 사람이시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곧 그리스도시다"는 이 믿음을 우리는 어떻게 갖게 된 것일까요? 어떻게 해서 나자렛 출신의 한 인물 예수님을 보고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되었을까요?

그 믿음은 불쑥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처음 그 고백을 전한 이들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드라마틱한 과정을 함께 한 제자들이었고 그들의 삶은 기쁨과 보람, 좌절과 슬픔, 깨달음과 소망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하느님의 일”로 선포하며 그들의 믿음을 통해 스스로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예수님과 같은 운명의 것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도 그 믿음을 이어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의 성경말씀들을 대하며 이렇게 반성의 물음을 던져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내용을 포함한 믿음인가?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 삶에 무슨 소용인가?


우리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려 몸소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미 안된다는 결론이 뻔한 일이지만 하느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하느님께서 약속하시면 일단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우리의 상식과 합리성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실은 우리의 상식과 합리성만 가지고는 도저히 해결이 안되는 문제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을 믿는 믿음이기에 결코 차원 낮은 몰상식한 믿음은 아닙니다.
그 믿음은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확실히 체험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데 소용됩니다.
그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 그의 몸된 공동체의 지체가 되게 하는데 소용됩니다.
그 믿음은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사는 일이 가능하도록 해줍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의 방법대로, 하느님의 시간을 따라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기꺼이 순종하도록 해주는 믿음입니다. (2003.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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