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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3월 15일 (사순3주일) 강론초 (요한 2:13-22 성전정화)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3. 11.


2009년 3월 15일 사순 3주일 성서말씀

출애 20:1-17

1 이 모든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2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3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4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5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7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없다고 하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10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11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
12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하지 못한다.

14 간음하지 못한다.

15 도둑질하지 못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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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9
 

1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줍니|다.
2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줍니|다.
3 그 이야기도 그 말|소리|도 ∥ 비록 들|리지|않아|도
4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 온 세상 땅 끝까지 |번져|갑니|다.
5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쳐 주시니: 마치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이 ∥ 신나게 치닫는 |용사|와 같|이,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 하늘 저 끝으로 돌|아가|고 ∥ 그 뜨거움을 벗어날 자 |없습|니-|다.
7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사람에게 생기를 돌|려주|고 ∥ 주님의 법도는 변함없어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 준|다.
8 주님의 분부는 그릇됨이 없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 주님의 법은 맑아서 사람의 눈을 |밝혀|준-|다.
9 주님의 말씀은 순수하여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고 ∥ 주님의 법령은 참되어 옳지 않은 |것이|없-|다.
10 금보다, 순금덩이보다 더 |좋-|고 ∥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욱|달-|다.
11 당신 종이 그 말씀으로 깨우침 |받-|고 ∥ 그대로 살면 후한 상을 |받겠|거-|늘,
12 뉘 있어 제 허물을 다 알|리이|까? ∥ 모르고 짓는 죄 일랑 말끔히 |씻어|주소|서.
13 일부러 범죄할까, 이 몸 막아 |주시|고 ∥ 죄의 손아귀에 잡힐까, 날 |지켜|주소|서.
# 그제야 이 몸은 대역죄 |씻-|고 ∥ 온전히 깨끗하게 |되리|이-|다.
14 내 바위요, 내 구원자이신 |주-|여, ∥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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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린 1:18-25

18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19 성서에도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버리고 똑똑하다는 자들의 식견을 물리치리라." 하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20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21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2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24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25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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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13-22 

13 유다인들의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버리며 그 상을 둘러엎으셨다. 16 그리고 비둘기 장수들에게 "이것들을 거두어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꾸짖으셨다.

17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의 머리에는 '2)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 하신 성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2)시편 69:9. 18 그 때에 유다인들이 나서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주겠소?" 하고 예수께 대들었다. 19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20 그들이 예수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 하고 또 대들었다. 21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 이 말씀을 생각하고 비로소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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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살아계신 하느님,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의 계명을 새겨 주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를 따라 헛된 욕심을 버리고, 살아 있는 하느님의 성전으로 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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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모두가 성전을 이루어 (요한 2:13-22)

“다시는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제도적인 종교에 속하는 우리 교회에게도 여전히 뼈아픈 말씀으로 들립니다. 

사회적인 분위기를 따라서 오늘의 교회는 성직자를 CEO로 삼아 복음의 메시지를 얼마나 매력있게 전달하고 교회운영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하여 많은 교인, 큰 건물을 유지하는가로 사목의 성공여부를 판단합니다. 

어느 유명한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한국에서 선교에 실패한 사례를 보려면 성공회를 보면 된다”고 예로 들었답니다. 일단 불쾌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실은 계속 이어지는 그 이의 분석과 지적에 따르면 우리 성공회가 실패한 중요한 이유는 오로지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반전이 남아있습니다. 교회의 성공과 실패를 숫자로 표현되는 지표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성공회도 정작 물어야 할 것은 교세를 어떻게 늘릴까 하는 고민 이전에 신자를 이루는 우리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성령을 모시는 성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제도적인 종교를 추종하는 것 이상의 신앙생활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깨닫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믿음은 하느님을 제도적인 군주로 여기기보다는 “돌아온 아들을 사랑으로 맞으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루가15장) 모시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성전제사와 율법준수라고 하는 신앙생활의 내용은 물론 지금 우리 교회 안에도 여전히 전례와 말씀을 통하여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차원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차원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과 사람들사이가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 의하여 중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나라의 도래, 곧 하느님께서 주권적으로 당신의 자비와 은총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조건없이 만나주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의 내용을 이루었습니다. 여기에 반대하여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고발하여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이 바로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입지를 위협하고 사회질서와 제도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제도로서의 교회는 끝없이 유혹을 받습니다. 교회 자체를 성직자가 주체가 되는 독자적인 기구처럼 인식하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기고자 합니다. 어쩌면 그간의 교회역사는 그 중개 역할의 독점권 또는 우선권을 두고 다퉈온 역사가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사회가 다원화되고 인본주의 사고가 팽배해짐에 교회의 전통적인 중개 역할이 의심을 받는 것처럼 보이자 어떤 교회들을 재빨리 종교적인 서비스의 품질향상을 통해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변신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교회와 성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주님의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불타는 열정”을 전하며 그 하느님의 집이 바로 성령께서 임재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전합니다. 그리고 부활과 승천하심과 성령강림을 경험한 제자들은 이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체로 삼아 이루어지는 교회공동체 자체로 이 땅에 현존하게 되셨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통하여 이루고자 했던 모든 인간질서의 완성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올바른 관계를 내용으로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 본래의 의미가 온전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이제 타율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율적인 사랑의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질서 자체입니다. 남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조장하고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희생을 마음 아파하고 불합리한 제도를 개혁하며 다른 이의 희생을 자기 희생적인 사랑으로 갚으려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렇게 다른 차원의 삶을 세상에 보여주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 구원의 도리, 곧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을 받아들이며 이기심에 근거한 욕망과 두려움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느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일을 오늘부터 종말까지 실천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들 교회입니다.

크고 화려하게 잘 지어진 성당에 다니는 일이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성전이 되어 성령을 따라 살며 성자를 통한 성부의 사랑을 누리고 예배하고 전하며 살아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 사순절기를 보내는 우리 각자의 작은 기도와 실천이 실은 앞으로 수십 수백년 동안 대를 이어가며 계속 지어질 위대한 우리 분당교회 성전의 한장한장 벽돌이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성전과 보이지 않는 성전 모두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2009.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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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열정 (요한 2:13-22) 

우리 분당교회 공동체는 작고 소박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처음에는 빈자리가 안타까웠지만 이제는 비좁은 자리가 부담스럽습니다. 우리 공동체에 알맞은 성전을 마련하는 것은 우리의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을 살피며 주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한국교회는 참으로 놀라운 성장을 이루어왔습니다만, 어떤 이들은 교회의 메시지를 세 마디로 요약하며 비웃습니다. “모이자, 돈내라, 집짓자!”

교회의 본질이 교회건물이 아님은 명백합니다. 교회건물을 “성전”이라며 크게 세우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준수와 성전제사봉행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두 축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의 역사를 통하여 자기 민족과 함께 해주신 야훼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 분의 현존을 체험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율법과 성전 그 자체를 부정하신 게 아니라, 그 참된 의미가 가려지고, 왜곡되고, 타락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613가지 율법조항을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해주시고, 예루살렘 성전 제사가 이루지 못하는 하느님과 그의 백성과의 참된 화해를 당신의 몸을 바쳐 이루어내십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영)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는 공동체를 “교회”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각 신자는 하느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의 전입니다.

우리가 성전마련은 단순한 건물공간의 확보를 넘어섭니다. 물론 적당한 공간을 우리의 재정적 부담으로 마련하는 일이 현실적인 과제입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일의 수행에는 “교회란 무엇인가, 우리 교회는 어떤 공동체인가”에 대한 우리의 신앙적 합의를 확인하는 노력과 과정이 병행된다는 점입니다.

우리 공동체에 맡겨진 소명을 되새기며, 우리가 꿈꾸는 미래를 위해서, 우리 모두의 사랑과 봉헌이 담긴 노력을 통해서, 우리의 성전마련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로또복권을 사야겠어요.!” 말씀합니다. 속마음으로 말하면 “가능한 한 아름다운 성전을 위해서 저도 정성을 다하고 싶습니다”는 의미이지요. 좋습니다. 우리는 함께 웃으며 서로를 바라봅니다. 우리의 그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 공동체의 그 마음이 바로 교회의 본질적인 내용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 은총에 감사하는 예배를 아름답게 드리며, 친교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경험하고 간직하게 하며, 그 사랑을 이웃들에게 나타내고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그 건물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축복하실 터이므로 비로소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2006.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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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력과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

드디어 이라크에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명분이야 어떻든 전쟁은 가장 나쁜 선택입니다. 파괴와 살육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인간들의 “능력과 지혜”를 잘 드러냅니다. 과학기술이 없어서 인류가 불행합니까? 과학기술로 첨단 무기를 만들어내서 다른 이의 삶터를 향해 쏟아 붓고 있지 않습니까? 철학과 윤리가 없어서 인류가 야만입니까? 여전히 신의 이름으로 악을 심판한다며 다른 이의 생명을 스스럼없이 빼앗는 일을 목소리 높여 찬양하는 것이 인간의 지혜입니다.

십계명을 주신 하느님은 결코 전쟁의 신, 유대민족의 신, 살육을 명령하는 신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신을 그렇게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이용하려는 시도를 철저히 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를 잇는 효를 통한 신앙의 전수, 다른 이의 생명을 존중할 것, 다른 이의 정조를 존중할 것, 다른 이의 소유를 인정할 것, 거짓증언 하지 말고 탐욕을 버릴 것을 명령합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자연을 자연으로 그렇게 본성 그대로 아름답게 관계 맺으면 그것이 낙원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과 어리석음은 모든 관계를 일그러뜨립니다. 전쟁은 그 일그러진 관계의 비극적 결과를 결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기심과 탐심이 그대로라면 그 어떤 종교적인 노력조차도 위선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 정화, 유대교의 정화를 위해 애쓰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성전건물이 아니라 희생과 사랑을 상징하는 성체성사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신앙인은 내게 이로운 기적과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살리는 것은 참된 사랑의 능력과 희생의 지혜임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깨닫고 배우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모두 함께 참된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평화를 위해 작은 일이라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2003.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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