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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7년 11월 18일 (세계성공회 평화대회 평화주일) 설교 (요한 20:19-23)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1. 18.

요한 20:19-23

19 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 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0 그리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21 예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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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이루시는 용서의 평화 (요한 20:19-38)

죄는 깨어진 관계입니다. 죄는 규정을 어긴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어김이 ‘관계’를 깨뜨린 일로서 문제가 됩니다. 규정과 처벌을 강화하는 일로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죄의 뿌리에는 자기중심적인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충족되면 쾌락이지만 충족되지 않으면 고통입니다. 쾌락을 보장하는 자기 소유를 빼앗겨서 더 이상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까를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에서 다른 이들에 대한 경쟁과 분노와 공격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려움에 갇혀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시어 평화의 인사를 하시며 성령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고 세상을 향한 평화의 사도직, 용서의 사제직을 당부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나라는 회복된 관계입니다. 자기중심적인 탐욕과 두려움과 분노가 사라진 세상입니다. 성공이란 이름의 세상적인 자격조건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총을 경험한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세상입니다. 쌓아두고 휘둘러서 자기를 높이려는 욕망이 필요 없는 세상, 낯선 타인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일 없이 환대하는 세상, 분노의 기운을 파괴적인 힘으로 발산하지 않고 자기와 세상을 가다듬는 긍정적인 힘으로 활용하는 세상, 그런 세상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용서하라”는 소명을 받습니다.

우리의 평화는 무슨 내용입니까? 불편한 모든 관계를 차단하고 그저 내 맘에 드는 상황, 나와 어울리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즐기는 평안입니까? 그게 평화일까요? 그런 평화가 가능할까요?

부활은 십자가 죽음 후에 일어납니다. 성령은 깨뜨려진 자아(自我) 위에 강림합니다. 용서는 우리 모두가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용서의 힘은 우리가 아닌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깊이 깨달은 후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죄의 대속(代贖)이라는 교리는 바로 이에 대한 설명입니다. 용서는 “좋은게 좋은거”니 대충 덮고 넘어가자는 일이 아닙니다. 용서는 어쩌면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욕심 없이, 두려움 없이, 분노 없이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조금이라도 우리의 자아를 공격하는 상황을 만나면 차라리 관계를 깨뜨려서라도 자기 자아를 보호하려 합니다. 관계를 깨뜨려서라도 지키려는 이기심이 바로 죄의 뿌리입니다. 용서는 바로 그 뿌리를 잘라내는 일인 것입니다. 용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용서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나서서 자기자신에게 실망하거나 위선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하라는 주님의 불가능한 요청에 따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이 세상의 경험을 초월하는 하느님나라의 경험을 구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이 바로 성령님의 강림과 내주입니다. 우리를 초월케하시는, 그래서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의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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