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환대(歡待)는 경청(敬聽)입니다 (루가 10:25-37)
7월 22일(연중 16주일)
임종호(프란시스) 신부
임종호(프란시스) 신부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종종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가령 하루 종일 일한 일꾼들에게나, 한 시간 일한 일꾼에게나 똑같이 대우한 ‘포도원주인의 비유’(마태 20:1-16)가 대표적입니다. 오늘의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 같으면서도, 생각하면 할수록 그 의미가 알쏭달쏭해집니다.
우리가 선입견과 경험에 비추어 이 말씀을 읽기 시작하면 대개 마르타는 애써 남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이타적인 인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에 비해 마리아의 태도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도리어 마르타를 나무라시고 마리아를 칭찬하시는 것에 당황하게 됩니다. 가령 교회 안에서도 몸을 아끼지 않고 여러가지 봉사를 하는 어머니보다도 뺀질뺀질^^ 하게 여겨질 정도로 몸을 사리면서 우아한 일만 좋아하는 어머니가 더 칭찬을 받는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이지요.
이런 해석의 오해를 풀어봅시다. 우선 마리아의 태도는 결코 한가롭고 이기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놀러오신 예수님과 노닥거리며 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세상을 유람 다니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나라의 말씀을 전하시러 “머리 둘 곳 조차 없이” 외로이 떠도신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전하신 말씀에 대한 권력자들의 반대와 모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마리아는 그 말씀을 전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 예수님께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경청(敬聽)을 통하여 마리아는 당시 여자의 몸으로 어엿한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께 인정받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촛점은 ‘봉사’와 ‘기도’를 대립시키는데 있지 않습니다. 중세에는 이 복음말씀이 사도적인 봉사를 하는 활동수도회보다 기도에 전념하는 관상수도회가 더 우월하다는 근거로 이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은 ‘사도봉사직’과 ‘관상기도’는 양자택일해야 하는 대립적인 일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하는 하느님나라의 일이지요.
오늘 복음이 관심하는 것은 참된 ‘환대(歡待)’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우리 마음과 삶에 모시는 것, 곧 ‘참된 환대’는 예수님께 이것저것을 바치고 잘 해드리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향한 참된 환대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敬聽)하여 그 분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일입니다. 활동을 하든 기도를 하든 우선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것은 ‘세상의 소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미사에 와 계신 여러분 모두가 바로 ‘참 좋은 몫을 택한’ 복된 ‘마리아’인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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