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설교

믿음이 희망

by 분당교회 2017. 11. 13.

2017년 11월 12일 연중 32주일 설교말씀

성공회 분당교회 김장환 엘리야 신부

마태 25:1-13


믿음이 희망


얼마 전, 예능에서 구탱이라고 불리며 사랑을 받던 영화배우 김주혁씨가 불의의 사고로 죽음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슬퍼했습니다. 이렇게 죽음은 늘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해갈 사람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의 말씀대로,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줍니다. 지난 금요일, 조금숙 모니카교우의 모친 변정순 카타리나 님이 별세하셨습니다. 96세나 되셨고 병원에 계셨기에 마음의 준비를 해오셨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조모니카님을 비롯한 유족들에게 슬픔을 줍니다. 


그런데 오늘 서신에서 사도 바울로는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문자 그대로 슬퍼하지 말라는 말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그 친밀한 관계가 단절되었는데,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순교한 스테파노를 경건한 사람 몇이 장사를 치러주는데, 크게 통곡하며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합니다. 저도 얼마 전, 오산교회 원로회장 이흥준 콜롬바 교우께서 별세하셔서 장례성찬예배 설교를 하는데 목이 메어 설교를 이어가기 힘들었습니다. 


죽음 앞에 슬퍼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가져오는 슬픔을 이기게 하는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희망이 무엇일까요?


또 죽음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아주 오래 전 인기 드라마였던 모래시계에서 최민수가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 죽음의 공포 앞에 두려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아주 잘 연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회법으로든, 질병으로든 죽음을 통지 받은 사람이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죽음을 통해 참되고 아름답고 복된 새 생명에 들어간다고 해서 죽음의 고통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간혹 예외적 경우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리스도인에게도 여전히 두렵고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이요, 고뇌일 것이다.” 자신이 겪은 두려움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신자들은 기꺼이 이 두려운 죽음의 길로 갔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 때문에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게 할 수 하는 걸까요? 


슬픔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는 희망, 그리고 순교를 감당하게 하는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14절 말씀을 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부활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이루어집니다. 

살전 4:16, 명령이 떨어지고 대천사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서신 18절에서 사도 바울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지체들에게 바로 이 사실로 ‘서로 위로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오늘 서신 말씀에서 몇 가지 용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먼저 17절을 보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신자들이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간다”는 말이 나옵니다. 많은 신자들이 문자적으로 믿는 휴거입니다. 


그런데 이 말들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구름’은 하느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상징합니다. ‘공중’은 마귀와 사탄들이 거하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서 성도들과 만난다는 말은 마귀와 죽음의 권세를 완전하게 정복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특별히 14절을 보면 공동번역으로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개역성경에는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개역성경의 번역이 원문에 더 가깝습니다.  even so them also which sleep in Jesus. 


성경은 죽은 사람을 “자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아무 활동도 없는 어떤 정지의 상태를 표현하기 보다는, 부활을 앞둔 일시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잠을 잔 후에는 깨어나듯, 죽음 이후에는 부활이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럼 죽은 사람이 주님의 재림으로 부활할 때까지는 어떤 상태로 있는 것일까요? 


루가복음서를 보면, 예수님 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죄수 두 사람이 좌우편에 십자가에 달려 죽어갔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를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죄수는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이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낙원에 들어가 고단한 인생의 모든 피로와 눈물과 슬픔을 씻고 쉰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품에서 안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상태인지 사도 바울로는 필립비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21-23, “21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22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서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여 있으나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또 그 편이 훨씬 낫겠습니다.” 


바울로의 속마음은 빨리 죽어 낙원에 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을 더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신지요? 


다만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전도의 사명이 있기에 24절,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서는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 있어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또한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 죽음이 주는 슬픔과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낙원의 안식과 영적인 새 몸으로 부활하는 구원을 받지 못할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낙원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이 별세한 신자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새로운 몸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 즉 불신자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희망이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슬기로운 처녀 다섯과 미련한 처녀 다섯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나오는데 ‘기름을 준비했느냐’입니다. 기름이 상징하는 것이 바로 이 ‘희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시어 우리를 다시 일어나게 하신다는 믿음이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하는 기름이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그 날과 그 시간은 알지 못해도 주님을 기다리는 깨어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에 대입 수능고사가 있습니다. 수능을 잘 봐서 희망하는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하는 학생은 지금 깨어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활이 이루어지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은 지금 나의 일상을 깨어나게 합니다. 그 ‘깨어 있는 삶의 내용’을 오늘 아모스서는 이렇게 제시합니다. 아모스서 5장 24절입니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 


오늘 1독서를 보면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아모스는 이렇게 하느님의 마음을 전합니다. 21-23, 21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22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23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종교인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종교인은 자기만족과 유익을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하느님에게만 예배드리며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모스의 말을 예수님의 버전으로 바꾸어 표현하면, “오직 하느님의 나라와 그가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일상에서 서로 사랑하며 하느님 나라를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새벽에는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지만, 정작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지 어떤 대형교회가 있습니다. 기업을 대물림하는 기업처럼 담임목사 자리를 세습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드리는 새벽예배는, 마치 예수님을 알지 못한 우리 조상들이 정한수 떠놓고 기도하던 것과 같은 종교행위일 뿐입니다. 


새벽에만 거룩한 사람들이 아닌 낮에도 거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장면이 나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닫힌 문 앞에서 “주님, 주님, 문 좀 열어 주세요.”하며 간청합니다. 신랑은 매몰차게 “분명히 들으시오.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지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마무리하는 곳에 나옵니다. 산상수훈이란 마태오복음 5장부터 7장까지가 나오는 하느님 나라 백성의 윤리 설교집입니다. 


7장 21절부터 23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22 그 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러나 그 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거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고 말할 것이다."


여러분이 이런 말을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매주일 선포하는 신앙의 신비를 믿으십시오.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이 믿음으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 가십시오. 


이 믿음으로 살다가 죽을 때 낙원에 들어가 안식하고, 주님 다시 오시는 날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