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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땅에 묻어두지 마라

by 분당교회 2017. 11. 19.

2017년 11월 19일 연중 33주일 설교말씀

성공회 분당교회 김장환 엘리야 신부

마태 25:14-30

땅에 묻어두지 마라


마태오복음에서 ‘하늘’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 때문에 ‘하느님’을 대체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마태오복음의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어떻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등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겼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도 있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있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준 것이라고 합니다. 평소 주인이 살펴보니 종이 지닌 능력에 차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 마태오


나눠주는 것은 주인의 권한이니 왜 달리 주냐고 따질 일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맡긴 재산이 엄청납니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6000데나리온은 적어도 15년 치의 임금입니다. 5-6억의 돈입니다. 결코 작은 돈이 아닙니다. 


여러분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군가가 당신에게 많은 돈을 맡기고 먼 여행을 떠났습니다. 서로 연락할 방법도 없고, 돌아올 날도 정해지지 않은 여행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돈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인의 허락이나 지시도 없었는데 그 돈으로 사업이나 장사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다가 망해서 돈을 다 날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잘 돼서 이익이 남는다면 그건 누구의 것이 되는 걸까요? 여러 생각이 드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 돈을 활용하여 받은 만큼의 돈을 벌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아무 일도 않고 그냥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돈을 지키는데 안전한 방법이 땅에 묻어두는 것이었습니다. 정직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시간이 흘러 주인이 돌아와 종들과 셈을 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주인이 ‘얼마 뒤’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의 정확한 뜻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아주 오랜 시간’입니다. 사업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모두 주인인 준 달란트를 이용해 받은 만큼의 달란트를 남겼다고 보고합니다. 주인은 칭찬하며 자신과 함께 기쁨을 나누자고 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이 무서워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다가 가져왔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호통을 치고 그 종을 밖으로 추방당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 알게 되는 하느님의 나라의 교훈들은 무엇일까요?


1. 하느님 나라에는 결산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먼 길을 떠났던 주인이 돌아오는 그 날이 결산의 날이었습니다. 결산의 결과는 주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과 밖으로 내어 쫓기는 것, 두 가지입니다. 이는 부활승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있게 되는 심판을 말합니다. 오늘 1독서는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이 ‘심판의 날’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재림은 심판입니다. 세 번째 종처럼 “내어 쫓기게” 됩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이에 반해 심판을 건너 뛰어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는” 종들이 있습니다. 재림으로 완성되는 하느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구원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 기쁨은 작은 일에 충성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한 기쁨을 말합니다. 


자주 말씀드렸듯이, 성경이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되어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Already 초림과 not yet 재림 사이를 성경은 말세라고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종말공동체입니다. 


그 때와 그 시간을 알 수 없지만,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십니다. 바로 그 주님의 날에 있는 심판을 받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심판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풍성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2. 심판의 기준은 ‘주인이 준 자원으로 살았느냐’입니다.

헬라어 원어로 ‘결산’이라는 말을 살펴보면, 누가 얼마를 벌었는가를 셈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따져본다는 의미입니다. 종들은 다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앞의 두 종들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주인이 준 자원으로 살아갑니다. 세 번째 종은 그 자원을 그냥 묻어둡니다. 주인이 준 자원을 어떻게 했느냐가 심판의 기준이었습니다. 


우리는 다 하느님으로부터 자원을 받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한 1:12,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요한이 말하는 ‘하느님의 자녀된 특권’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 자격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예배하고도 하고 기도라고도 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면 다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 14: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주겠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요한 14:16-17,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성령은 각 사람에게 ‘은총의 선물’을 주시어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며 하느님의 선교를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고전 12:7,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라고 합니다. 로마서 8: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세워가며,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 완성되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3. 주님이 주신 자원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용하면 할수록 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종, 두 달란트 종 모두 배가하는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기도는 깊어지며 기도를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을 경험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여 섬기면 섬길수록 은사는 자라나며 많은 열매가 맺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럴 때 결산의 때에 칭찬받습니다.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세 번째 종의 행위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자원으로 살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불신앙입니다. 결산의 때에 심판받는 삶입니다.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아라.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4. 세 번째 종이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적으로 주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자원을 땅에 묻어둔 세 번째 종의 이야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을 심지 않는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는 데서 모으는 사람이라는 자의적인 판단 속에서 주인에 대해 두려움과 멸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하느님에 대해서 그릇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부모님, 특별히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경험이 하느님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것을 봅니다. 가부장적인 유교 문화에서 엄격하고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은 하느님을 벌을 주는 훈장 선생님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이미지가 있으면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두려운 분으로 여깁니다. 자신이 좀 잘하면 스스로 자기 의에 빠지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잘못하면 죄책감에 사로잡혀 힘들어 합니다. 


배가 되는 이익을 남긴 종들은 특이한 행동을 보입니다. 주인이 달란트를 맡기자, “곧 가서” 그 달란트를 활용했다고 합니다. “곧 가서”라는 표현은 종들이 주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자신들은 아들이 아닌, 상속권이 없는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재산을 맡겼다는 것은 자신들을 아들로 받아줬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아들로 받아주고 돈을 맡긴 주인에 대한 종의 태도가 어땠겠습니까? 감사와 헌신입니다. 주인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오늘 서신에서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줍니다. 9-10, 9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10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 수 있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교회라는 새로운 하느님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 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신뢰하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이 고백이 있는 사람들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지 않습니다. 


5. 지금 우리를 살게 하는 자원, “달란트”는 “사랑”입니다. 

루가복음 7장에 보면, 바리사이파 사람의 초대로 식사를 하던 예수님에게 와서 향유를 부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행실이 나쁜 여인이라고 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이 속으로 여인의 행동을 받아주시는 예수님에 대해 비난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 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는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리스도인이라도 각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정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해서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감사성찬예배에 참예하는 정도로 주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사랑을 받았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자신이 가진 사랑의 자원으로 애쓰다가 지치고 실패합니다. 어떤 반응이어도 하느님은 귀하게 여기시고 받아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랑으로 살아가면 갈수록 사랑이 자라나고 깊어집니다.  자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말합니다. 11절,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미 하고 있


오늘 서신에서 사도 바울로는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사랑의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와주십시오.”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와주는 사랑의 삶”이 여기에 모여 예배드리는 이유입니다. 이미 우리는, 부족하지만 이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이 사랑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으로 살다가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서서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된 종이다.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주님의 칭찬을 받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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