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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9월 21일 (연중 25주일) 강론초 (마태 20:1-16 포도원일꾼과 품삯의 비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9. 18.


마태 20:1-16

1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3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4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5 그들도 일하러 갔다. 주인은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보니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다. 7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8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9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0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11 그들은 돈을 받아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12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13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14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15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16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사랑의 하느님, 주님의 자비와 용서는 무한하시어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항상 풍성하게 베푸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모든 이기심을 버리고 기꺼운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마침내 주님이 주시는 큰 상급을 얻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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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품삯에 만족하는 신앙  

신앙생활은 매우 은혜롭고 낭만적인 것 같지만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신앙생활은 매우 냉정하게 현실을 사는 일입니다. 무엇이 냉정한가 하면 하느님이 하느님인 사실 자체가 제일 냉정합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이신 진실은 참으로 우리에게 두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흔히 하느님을 “절대적인 타자(他者)”이라고 표현하는 까닭도 하느님은 절대로 우리 마음에 드는 가치를 투사한 이미지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와 비슷하여 내 맘을 알아주고 내 소원을 척척 들어주는 하느님은 실은 내가 지어낸 우상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 우상을 하느님으로 소개하고 뒤에서 소개비를 챙기는 가짜 종교인이 많은 현실이니 매우 주의하셔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너무 빨리 입에 발린 소리로 고백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고백하기 전에 하느님의 냉정함을 경험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마치 아니 계신 것처럼 우리에게 냉정하신 하느님, 우리의 간구에도 불구하고 전혀 우리 뜻과는 정반대로 행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느님을 뼈저리게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사형통의 시기에 고백하는 하느님과 가난과 병고와 시련과 억울함 속에서 고백하는 하느님이 같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달라지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깨우치는 우리 고백의 차원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그저 “오냐오냐, 다 좋으니 네 맘대로 살아라” 하시는 차원이 아닙니다. 자식을 사랑하여 모든 조건을 다 들어주는 부자 아버지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맞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신앙은 냉혹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우리 뜻이 부딪히면 결국은 우리가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그 피땀 흘리는 기도를 통하여 결국 자신의 뜻을 죽이셨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참된 고백이 되려면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절대의 주님이시고 우리는 보잘 것 없는 피조물이요 상대적인 종의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본래 세례의 의미도 우리 허물을 씻어주시는 자애로운 손길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도리어 냉정하게 물속에서 우리를 죽이고 새로 태어나는 일을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서는 포도원 일꾼과 품삯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의 인생살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하느님의 포도원에서 일하고 품삯을 얻는 일입니다. 인생은 우리가 물려받은 재산으로 이자놀이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주인이 아니고 종입니다.

하느님께 시비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동료를 시기 질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합리성의 잣대, 인간적인 정의를 내세우며 하느님께 대드는 일이 어쩌면 낡은 종교에 도전하는 휴머니즘의 태도로 여겨질 지로 모릅니다. 하지만 속지 말아야 합니다. 참된 휴머니즘은 겸손입니다. 참된 휴머니즘은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가 흙먼지 같은 인간들이고, 인간들사이에서는 모두 동등한 인간일 뿐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인간'을 뜻하는 휴먼(Human)이란 말은 라틴어 '호모(Homo)'에서 나온 말이고, '호모'는 '흙'을 뜻하는 '호무스(Homus)'에서 나온 어원입니다.)

타고난 신분이나 발휘된 능력이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앙의 관점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삶을 하느님과의 계약으로 깨닫고, 맡겨진 일에 헌신하고 주어지는 보상에 감사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기쁘게 내 몫의 일을 하고 감사히 내 몫의 품삯을 받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살이에 그 밖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루 품삯 이상을 받지 못해 분노할 까닭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인생을 원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지고 온 것도 없고 가지고 갈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맥락은 예수님 추종의 상급에 대하여 묻는 베드로에게 백배의 보상을 말씀하신 후에 보충하신 말씀입니다. 보상, 즉 댓가를 바라는 일에서 우리는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일을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복된 사람은 하느님의 참된 보상은 우리의 삶을 통해 이미 주어지고 있음을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으로 인해 행복한 인생,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생이 이미 충분한 보상입니다. 가족과 재산과 명예에 대한 백배의 상은 덤일 뿐입니다.

안타까운 사람은 자기가 받을 복, 보상, 댓가가 하느님보다도 더 중요해진 사람입니다. 토지보상이 억울해서 남대문에 불을 지른 노인이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너무 보상에만 관심을 두면 자칫 천국문에 불을 지르는 사람이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교회는 교회위원 선거를 마무리 합니다. 위원에 선출되신 일은 무슨 명예를 얻고 감투를 쓴 일이 아닙니다. 사양할 일도 아니고 장담할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죽었고 주님 안에서 새 삶을 산다고 하는 고백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맡겨주신 일을 맡았고 우리에게 필요한 품삯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보다도 더 의욕적으로 일 욕심을 부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앞서 뛰어도 품삯을 더 받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맡기시는 일을 회피해버리면 품삯은 없습니다. 공허한 인생이 됩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하느님과의 계약에서 이루어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위원님들은 물론 우리 모두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큰 상급은 상급이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작아지고 낮아지면 가장 작은 상급조차도 가장 큰 상급이 되기 때문입니다. 욕심과 비교가 여전하면 그 어떤 상급에도 만족을 못할 것입니다.^^
참으로 큰 상급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신뢰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기꺼이 가장 작은 자로 낮아져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2008. 9.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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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왜 종종 내 맘에 들지 않을까^^”

오늘 복음을 읽고 무언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고 해서 찜찜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선량하고 합리적인^^ 인간들은 오늘 복음말씀을 이해하는데 난처해합니다.

포도원주인이 맨 나중에 온 일꾼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물론 자비로운 일이라 해도, 아침 일찍부터 하루종일 일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고 불평하는 그들을 도리어 나무라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려운 불공정한 처사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늘의 이 불합리한 비유야말로 복음의 핵심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선포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말씀이 바로 복음(福音)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나라”를 우리가 생각하고 경험하고 기대하는 인간적 질서의 연장, 확대, 완성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내가 바라고 꿈꾸는 “하느님 나라!” 이런 것은 애당초 없습니다.

신앙의 전제가 되는 “회개”라는 것은 그래서 무슨 이런저런 죄의식에 눈물 흘리고 후회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하느님은 나와 전적으로 수준과 차원이 다른 분이시다. 더 이상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서 나의 욕심과 생각을 내세우지 않겠다.”는 결단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포도원주인으로 비유되는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의로우심”이 먼저 와서 일한 일꾼들로 비유되는 인간들의 “공로의식”과 “시기질투”에 대비되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인간 자체를 향한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업적에 대한 상급이 아닙니다.
선한 주인의 판단은 포도원경영의 효율성을 따져서 된 것이 아니라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도 하루의 생계는 유지해야 한다는 자비로운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럼 새벽부터 열심히 일한 일꾼들에게는 왜 2-3 데나리온을 주지 않고 그렇게 냉정했을까요?
정답은 “본래 계약이 그러했으므로” 입니다. 포도원주인이 인색해서가 아닙니다. 아마 2데나리온을 주었으면 당장 다음날부터 그들은 하루일당이 2데나리온이 당연한 것처럼 주장할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욕심과 경쟁에 따라서 대가(對價)를 추구하면 한도 끝도 없는 법입니다.
인간에게 참된 행복은 최선을 다하고 분수를 지키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탐욕스럽게 더 일하고 더 모은다고 더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부자들이 “행복”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은 겉모습의 것이거나 불의한 쾌락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하는 일, 하느님의 의로우심에 만족하는 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박한 행복의 비결입니다. 아니 이것이 바로 구원의 내용이요, 영생의 비결입니다. (2005. 9.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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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정의(正義)와 하느님의 정의(正義)

오늘 복음의 “포도원 일꾼과 품삯”의 비유는 많은 이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이른 아침부터 온종일 땀 흘려 일한 일꾼과 막판에 와서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에게 똑같이 하루 품삯을 주는 포도원주인의 처사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의(正義)의 이름을 내세우며 도리어 온갖 파괴와 살육과 불의가 자행되는 전쟁도 서슴지 않는 우리들은 설사 하느님이시라 해도 그런 불공정한 일을 하셔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점, 곧 하느님의 뜻은 우리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점에서 우리는 진정한 구원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머리로 내 입장에서의 구원을 생각합니까?
이런 저런 조건을 충족시키면 하느님도 어쩔 수 없이 줄 수 밖에 없는 그런 구원을 꿈꾸는 이는 엄밀히 말해 신앙인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직 모르는 사람입니다.
나를 위해 내 생각대로 세상이 돌아가기를 원하는 식의 그런 구원은 우리의 착각이고 환상이고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우리의 정의에 대한 추구가 대단한 것 같아도 실상 좀더 깊이 반성해보면 우리의 정의관념은 결국 이해타산에 달려있는 것임이 드러납니다.

인간의 정의관점에 따르면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과 가난과 비참은 어쩌면 생존경쟁의 자연스런 결과로서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랜 세월, 어쩌면 지금까지도 인류는 그런 논리를 따라 그렇게 살아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는 이해타산이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삶에 대한 보장에 근거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능력에 따라 인간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업적에 따라 사랑에 차등을 두지도 않습니다.
생존경쟁(生存競爭)이 아니라 상조상생(相助相生)이 하느님이 바라시는 일입니다.

실상 손해 본 것이 없으면서도 불공평하다는 생각 때문에 불평하는 먼저 온 일꾼은 우리들의 본성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불평하고 있는 것일까요?
정말 그 논리만이 정의로운 것일까요? (2002.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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