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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9월 7일 (연중 23주일) 강론초 (마태 18:15-20)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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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8:15-20

15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다. 16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리하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확정하여라.' 한 말씀대로 모든 사실을 밝혀라. 17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19 "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 20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주 하느님, 우리보다 항상 앞서 가시며 이끌어 주시나이다. 구하오니, 모든 일의 처음과 끝을 주관하시어 언제나 바른 길로 가게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한 분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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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사랑, 공동체의 사랑 (마태18:15-20) 

신앙생활의 전제는 일상생활입니다. 구원을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라고 보는 것은 너무 좁은 이해입니다. 신앙생활은 이 세상의 삶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살아가는 일입니다. 구원은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공동체의 사랑”을 깨닫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율법의 골자는 모든 것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이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하느님께 무엇을 바치고 무엇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라고 여기면 오해가 생깁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존재를 향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실에 의해 좌우되는 상대적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인간의 경험과 판단을 하느님께 투사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오해를 바로잡고자 하느님을 새롭게 소개하셨고 마침내 그 사랑의 절대성을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하느님 사랑의 절대성을 깨닫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진실한 응답으로서만 우리는 감히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표현하게 됩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 이런저런 일을 해드리는 일로 내세워지기 이전에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자신을 감사하고 행복해 하는 일로 먼저 드러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도 내가 주체가 되어 이웃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베풀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이웃은 나의 구원을 위해 수단과 기회가 되기 위한 존재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웃과 내가 함께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형제자매이며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고 주님의 벗임을 깨우치는 일입니다. 공동체를 이룬 일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께 부름 받은 우리들 신앙의 본질적 성격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우리들 만남의 차원이 변화합니다. 나의 대상으로, 나의 이해관계에 걸린 거래의 상대로서가 아니라 함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의 형제자매로 대하게 됩니다.
신자들도 서로에게 또는 공동체에 잘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형제자매는 그 잘못을 이유로 쉽게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세례와 성찬을 통해 신자공동체를 이루는 일은 이미 서로에게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지는 일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씨앗은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꽃피우고 열매 맺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우리의 명분이 아니라 주님의 현존입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참된 공동체이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반성하고 신뢰하고 감사합시다. ✠ (2008.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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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우리는 교회에 다닙니다. 그런데 막상 교회가 무엇일까? 하고 물으면 대답이 쉽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교회를 “복음을 생활하는 선교 공동체”라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배드리러, 기도하러 가는 곳이지만, 장소나 건물이 교회의 본질은 아닙니다. 예배도, 기도도 공동체로 모인 교우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성령의 공동체로서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개인이 가서 예배를 보고 오고, 기도를 하고 오는 장소나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내가 속한 “복음을 살아가는 선교 공동체”입니다.

우리 서울주교좌 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의 하나이고 거기서 이루어지는 예전 또한 지극히 거룩하고 은혜롭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예배를 보고 기도를 드리는 많은 교우들은 교회의 본질이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바로 “내가 속한 공동체”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제게는 이 땅의 적지 않은 대형교회들이 진정한 공동체가 아니라 큰 건물과 목사의 설교를 관람하는 대중의 집합처럼 여겨집니다. 건물과 목회자의 카리스마와 조직에 의한 회중관리가 참 교회를 보장하는 것 아닙니다. 

교우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참된 고백으로 모여야 참된 교회가 가능합니다.
교우들이 삶속에서 체험한 복음의 능력이 중요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깨우칩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도록 합니다.
우리를 사로잡는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우리는 타율적인 율법의 준수를 강요받는 노예가 아니라 자율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자유로운 자녀로 살게 됩니다. 그러한 교우들이 서로서로 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사랑의 의무가 공동체를 이루어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떤 이를 용서해주어야만 그가 천당에 갈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시면 이는 지나친 아전인수(我田引水)의 해석입니다. 이 말씀의 참뜻은 우리의 이 땅에서의 구체적 세상살이, 우리의 인간관계 속에서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고 갈파한 요한의 말도 같은 뜻입니다.

교회는 바로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나라”를 경험한 이들이 그것을 넉넉히 누리고, 깊게 하고, 펼쳐가도록 하느님께서 이 땅 위에 모으신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교회를 세상에 대비되는 “대안(對案)공동체, 대조(對照)공동체”라고 표현합니다.

실상이 이러함으로 저와 여러분이 우리 작은 분당교회 공동체를 사랑하고 축복하고 자랑하는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2005.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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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두 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교회는 천국에 있지 않고 이 세상 한복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도리어 이 세상을 뛰어넘는 하늘나라의 가치를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부족한 인간들인지라 끝없이 세상의 가치와 논리를 교회 안으로 들여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때 성직자들도 그만 착각해서 그저 교회건물이 크고 교인수와 헌금이 많으면 그게 좋은 교회요 성공한 목회인줄 알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신자들도 순진한 나머지 하느님께 빌고 매달려서 병고치고 부자 되고 출세하면 그것이 잘 하는 신앙생활로 하느님께 영광 돌리는 줄 알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이 이제는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교회 밖의 많은 이들이 한국교회를 타락한 이익집단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내세울 복음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전할 주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말하는 구원이란 어떤 것이며 그렇게 구원받은 이들로서 살아가는 신자와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 것입니까? 

그래서 오늘의 주님의 말씀은 우리 교회의 본질을 돌아보게 합니다.

“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 단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교우 여러분, 우리 정말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십시다. 비록 적은 숫자일지라도 다른 생각 없이 오로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십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 원하는 것은 내 욕심 채우는 소원성취가 아닙니다. 나만 잘되는 만사형통이 아니고 죽은 뒤에도 나 홀로 천당 가서 잘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은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함께 해주시리라는 우리 주님을 만나 뵙기 위함입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 “두 세 사람”으로, 내 욕심과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주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만나 뵈면, 그로인해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체험하는 것입니다.(2002.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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