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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8월 31일 (연중 22주일) 강론초 (마태 16:21-28 예수님의 첫번째 수난예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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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6:21-28

21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려주셨다. 22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리었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셨다.

24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25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줄 것이다.

28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주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임을 보여주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를 새롭게 하시어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지 않고,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주님께 바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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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 (마태16:21-28) 

오늘 “수난예고” 복음을 통해 십자가 고난의 성격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왜 그리스도의 길을 수난의 길로 여기셨을까요? 왜 우리에게도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권력과 명예를 드높이고 반대자를 제압하며 구원자로서의 사역을 행했더라면 더 멋진 일 아닐까요? 우리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은 덕분으로 이 세상에서 복을 가득 받아 부귀영화를 누리며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다가 저 세상에서도 천국복락을 누리면 좋은 일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우리는 구원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은 세상살이를 포기하고 교회 일에만 충성을 다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은 자기를 넘어서며, 자기를 완성하는 일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일은 자포자기를 권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강요하는 가짜 이미지에 속아 매달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가짜는 진짜 앞에서 드러나는데 진짜는 하느님께서 말씀의 빛으로 비추시는 우리의 존재입니다. 구원의 삶은 진짜 자기를 깨달아 사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도록”이 아니라 “세상을 참되게 살도록” 구원 받습니다. 구원의 능력은 우리를 휴거(携擧)하여 하늘로 집어 올리는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질서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미 자기의 체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충분한 자기 논리로 무장하였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현실적으로 이해하면 하느님의 질서를 전하시는 예수님이 자기들의 질서를 지키려는 기득권자들과 충돌하신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질서와 세상의 질서가 부딪히는 경계선 위에 세워집니다. 부활의 빛에서 보면 십자가는 세상의 질서가 하느님의 질서에 의해 정복되는 중심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지만 하느님의 질서를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질서를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을 짐승의 수준에서 일으켜 하느님의 자녀로 드높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상황에 따라 우리가 선택하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는 처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려면 우리의 삶 자체가 반드시 십자가의 길이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하느님 은총의 생생한 증거, 현존의 증표가 되고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이 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께 우리 믿음을 내세워서 무엇을 구하고 얻어내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은 우리 삶을 통하여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을 주님과 함께 걷는 일인 것입니다. (2008.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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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따르는 길 -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라는 분의 가르침과 삶과 영을 통하여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참으로 알고 동시에 우리 인생의 삶이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를 깊이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깨달음과 고백을 온 몸으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인 것은 단순히 초월자, 절대자에게 우리의 소원을 간구하여서 이를 성취한다는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에 성황당에서 치성을 드리던 이들도 다 하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간구하여 모두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구원에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세상에서의 복락도 아니고 단순히 죄의식과 불안감을 벗어버린 마음의 평정도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한 번뿐인 이 생명,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서 죄와 죽음을 이기며 기쁨과 보람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비참하고 어두운 역사 가운데에서 하느님 나라를 소망하시며 사셨던 예수님은 스스로의 운명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인생임을 깨달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길은 외면적으로 보여지는 것 같은 어둡고 참담한 패배의 길이 아니라 실제는 찬란한 승리로 이어지는 부활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피하지 않고 사랑과 순종으로 기꺼이 걸어서 우리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바로 당신께서 실제로 경험하신 삶의 비결을 일러주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기를 버리는 것”은 이 세상살이를 자기가 중심이 되어 이기적으로, 독선적으로, 자기에 갇혀 살지 말고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버린다고 해서 세상을 초탈한 사람처럼, 무념무상하게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은 그럼에도 주어진 인생살이에 성실하고 진지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어지는 책임, 닥치는 고난, 맞서게 되는 시련에 우리는 더욱 의연해야하고 그럴 수 있습니다. 자기를 버림으로써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신 우리의 삶은 이제 단순한 생명의 존속이 아니라 소명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피하는 삶은 비겁한 연명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은 지혜롭고 용감한 초월입니다. (2005. 8.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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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예수님 말씀대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다 "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내가 우선 잘되고 보아야 남도 도울 수 있고 내가 먼저 구원받아야 남에게도 구원의 도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조롱하던 자들도 비슷하게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구나.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고 말고."

그리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내다보시는 예수님께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하고 만류하던 베드로의 충심마저도 비슷한 생각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어디에서 잘못된 것일까요? 어떻게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구분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 구원의 능력이라 할 수 있는 “힘(권력)”과 “사랑(아가페)”을 대비시킬 때 이해됩니다.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권력을 쟁취하여 힘의 논리로 해결하려드는 것은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를 희생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으로 풀어가시는 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인간은 “문제의 원인은 네게 있으므로 내가 아닌 네가 참고 희생해야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상대가 못 참고 대들면 내가 가진 힘으로 혼내주는 것이 인간들의 정의(正義)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네게 강요하지 않고 내가 먼저 나를 내어줌으로써 문제를 풀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마저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길이 참으시고 구원의 기회를 닫지 않으시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正義)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의 논리로 인간적인 업적을 쌓아가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우리의 삶 안에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마치 제 목숨을 잃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느껴질지라도) 우리를 중심으로 한 좁은 시야를 버리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넓은 시야를 (그것이 참으로 사는 길임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2002.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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