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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8월 17일 (연중 20주일) 강론초 (마태 15:21-28 가나안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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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15:21-28

2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22 이 때 그 지방에 와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나서서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고 계속 간청하였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가까이 와서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24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2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26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며 거절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28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전능하신 하느님, 성령을 보내시어 죄의 억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하느님의 참 자녀로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주님이 주시는 영광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한 분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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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하느님의 차별이 아니라 자비를 믿는다! >

오늘 복음말씀은 매우 생동감 있는 매력적인 대목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의 말씀”만을 들려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렇다”고 하는 말씀들은 곧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는 규준이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성경의 말씀들을 두고 그것이 전하는 진리성에 대하여 “과연 그러한가”를 더 숙고하고 의논하여 결정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자가 강조되는 입장은 대단히 신실한 믿음을 자랑하긴 하지만 이른바 “문자주의, 근본주의”로 비판을 받습니다. 후자가 강조되는 입장은 폭넓은 인간이성과 다양한 경험을 존중하긴 하지만 이른바 “인본주의”로 비판을 받습니다. 물론 비판을 받는다고 꼭 나쁜 입장인 것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교우 여러분이 정직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함께 의견을 나누는 일입니다. 이른바 신앙의 권위 문제, 곧 분별의 문제, 곧 어떤 일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의 문제가 바로 이러한 내용들입니다. 이에 대한 성공회의 모색은 이른바, “성서, 전통, 이성”이라고 하는 삼중적인 종합을 결론으로 합니다.  

성경은 종종 틀린 표현과 제한된 인식과 잘못된 판단을 포함합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은 특정하게 규정된 옳고 그름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전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옳고 그름은 구체적인 인간들의 삶의 현실 속에서 벌어진 사태를 두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뜻을 물을 때 그 상황 속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이 진리라고 진리인 성경이 말하기 때문에 성경은 진리"라는 순환논리를 내세우는 일이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는 우리가 머리 속에 달달 외워서 그 때 그 때 적용하기만 하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그런 “주문”이나 “법칙”이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을 비추며 우리의 문제를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 가져가게 합니다. 우리의 “실존”과 우리들의 “역사”를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 세웁니다. 말씀과 기도와 삶을 통하여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경험합니다. 신앙공동체의 수준에서 우리는 성서와 전통과 이성의 권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이 깨우치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교회공동체의 경험과 고백이 성경의 진리성을 증언합니다.  


이제 복음말씀으로 돌아가 살펴봅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예수님의 거절은 주님의 말씀이기에 확고 불변한 “진리의 말씀”일까요? 여전히 하느님께는 자녀들에 속하는 이들이 따로 있고 강아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 따로 있는 것일까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는 가나안 여인의 대답은 귀하고 아름답고 위대합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에서 예수님은 분명 “제한된 생각”, “좋지 못한 판단”을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람을 차별하던 생각과 태도를 당신의 말씀에 반영하셨습니다. 이를 받아치며 이 비천한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깨우치는 벗이 되었습니다.  

자, 이런 해석은 예수님께 대한 불경이라구요?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복음성경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들을 전혀 감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마치 신화적인 절대자로 묘사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했겠지만 실상 그것은 복음서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 되신 “사람의 아들”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전하셨는가, 그리고 그 분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을 통해 어떻게 그 분이 제자들의 고백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되셨는가를 전하는 것이 복음서의 관심입니다.  

제가 지금 예수님을 비난하려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제가 드리려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이상하게 느낀 대로 정직하게 여쭈어보고 숙고해보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의 미덕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마치 주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행동하는 종과 같은 수준의 믿음에 머무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과 같은 수준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는 일에 지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를 불신하거나 실망하지도 아니 하십니다. 걱정없이 우리는 예수님께 묻고 듣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일에 예수님과 같은 차원에 올랐다는 일이 결코 불경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도리어 칭찬받을 일이고 실제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 이방인 여인이 용감하고 지혜롭게 예수님께 한 방 멋진 말씀의 펀치를 날린 것은 통쾌한 일이었습니다. 여인이 못다한 표현을 추론하여 보태봅니다. “우리가 강아지라구요? 그것이 주님의 판단이라해도 내겐 전혀 관계없습니다. 저는 다만 하느님의 차별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구할 따름입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자비 앞에는 차별이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 여인의 대답에 경탄하며 칭찬하시고, 하느님께 자비를 간구하는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시어 그녀의 딸을 낫게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유대인 남자이시고 마태오는 유대인 중심의 공동체의 복음사가입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정체성으로 삼는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전제 속에서 가나안 여인의 고백을 통하여 참된 믿음과 살아계신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약간 이상해 보이는!^^) 예수님의 태도와 말씀은 이방인 여인을 시험하시려는 것이기 보다는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인 것으로 보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는 제자들은 이미 하느님의 구원은 유다인들에게만 국한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고 하신 말씀은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하시는 반문과도 같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멋진 응수는 예수님께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는 경탄어린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 이방인 여인 덕분에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실 수 있었습니다. 

“자, 너희가 강아지 취급하는 이 이방인 여인의 믿음과 신뢰와 사랑이 이러하다. 하느님의 자녀임을 자부하는 너희는 과연 이만한 믿음과 신뢰와 사랑이 있느냐? 그리고 과연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자녀와 강아지로 따로 구분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이 말없이 깊은 가르침은 훗날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이방인출신의 교우들을 율법준수의 조건없이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대인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모시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는 유대인 중심의 마태오 공동체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이 세상 땅 끝까지의 선교를 당부하시는 이른바 대위임령의 말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나라는 혈통과 율법준수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로 성립되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나라의 소망이 어마어마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매우 사소하고 구체적인 일상의 사건을 계기로 드러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평소 “자연스럽게” 멸시 당함에 익숙해 있던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의 짐짓 멸시 섞인 거절에 대하여 “과연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적인 조건으로 제한되는 성격의 것인가?”를 정곡으로 찔러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경탄하시며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머리 속에 흔들림 없는 어떤 관점이나 규정을 가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모든 사건과 사태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께 그 모든 일의 깊은 연관과 의미를 묻는 태도이고 그 생생한 의미를 나의 것으로 소화하여 살아가는 일입니다. 말씀은 단지 전해들은 소문일 수 없습니다. 말씀에는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고백, 우리의 간증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삶은 오늘 나의 기도 속에 살아있는 나의 진정한 물음과 경청과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에는 분별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분별력은 시시비비의 큼직한 잣대를 머릿속에 가져서 생기는 능력이 아닙니다. 참된 분별력은 사랑의 힘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하느님의 사랑이 나와 이웃에게 은총으로 작용하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매사를 전제없이 하느님께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를 매사에 대하여 가장 적절한 분별을 하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신 주님의 칭찬을 우리의 것으로 삼게 해주실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가 사랑으로 요청하는 것을 거절하실 리가 없고 가장 좋은 것 곧 성령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2008.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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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인간적 차별을 넘어 하느님의 사랑을 본다 

우리 믿음이 가장 위험한 경우는 고난 속에서 두려움이나 회의에 빠져드는 때가 아닙니다. 도리어 진짜 믿음의 위기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우리의 생각과 욕망의 투사(投射)로써 마음대로 지어낼 때 생겨납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하느님을 경험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느님께 대한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위험한 것은 우리가 우리 각자의 하느님께 대한 체험과 견해를 고정시키고 절대화시키는 일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신 영이셔서 우리의 영과 교제하시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십니다. 하느님 편에서 사랑의 주권을 가지고 계셔서 하느님의 뜻을 펼쳐 가십니다. 우주를 어떤 법칙에 맡겨놓고 저 편에서 바라만 보시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폭군같은 하느님도 아니시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노려보시는 재판관도 아니십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가르침을 통해서, 성자와 성부와 성령의 성삼위의 신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달아갑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아버지와 같으시고,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자녀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개가 사랑받는 이유, 간혹 대단히 칭찬을 받는 까닭은 바로 주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충성 때문입니다. 종종 우리 믿음은 개만도 못한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욕망하고 판단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자기의 경험이나 가치를 절대적으로 주장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지어낸 욕망의 투사(投射)로서 “요술방망이 하느님”을 꿈꾸는 것이 아니고, 인간적 차별과 장벽을 정당화시키는 “우리 편 하느님”을 고집하는 것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통하여 차별 없고 장벽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필요하고 마땅하고 옳은 탄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간절히 간구할 때, 여전히 현실의 변화는 더디 느껴지고, 주님의 응답이 의심스러울 때, 우리는 얼마나 더욱 고통스럽습니까? 자녀가 아니라 강아지만도 못한 기분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본래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가 아닙니까? 다만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 성령을 통하여, 거룩하신 분의 자녀가 된 것 아닙니까?

우리의 옛 처지와 주님의 사랑을 다시 기억하면 우리는 다시금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고 하느님의 은총의 손길에 우리 삶을 내맡길 수 있습니다.
스스로 지어낸 알량한 자존심을 내려놓으면 우리는 진정 자유롭고 평안합니다.
우리 모두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2005. 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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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에 이르는 장한 믿음 

믿음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믿음은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일이고 우리의 귀하고 복된 삶을 방해하는 것들로부터 풀려나는 일입니다.

믿음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엇을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절박한 “필요”를 위해서 간구할 뿐인데, 간절한 사랑으로 딸의 치유를 청하는 가나안 여인은 이런 믿음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우리 현실을 그저 합리화해서 평안함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떠난 나의 현실은 정말 비참한 것임을 깨닫는 민감함으로 하느님께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내 에고를 만족시키는 나의 덕성이 아닙니다. 더 이상 내가 나를 고집할 필요 없고, 혈연, 지연, 학벌, 재산, 직업, 지위, 업적 등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쓸 필요 없이, 그저 하느님 앞에서 내가 귀함을 깊이 아는 일입니다.  

믿음은 나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대개 성공이 아니라 실패와 고통이 오히려 우리를 믿음의 길로 참되게 가게 합니다. 다른 것을 내세우지 않고 그 고통의 해결을 위해 곧바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길에서 우리는 주님을 붙잡습니다.
그래서 참된 주님의 뜻과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유대인의 차별이 지어낸 이름 “강아지(개새끼)”로 멸시받은 이 가나안 이방여인은 그러나 개의치 않았습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차별을 넘어선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이 여인의 이런 장한 믿음을 통해서 믿음의 본질이 드러나고, 이방인을 차별하던 유대인들이야말로 “강아지만도 못한 인간”들임이 드러납니다.(2002.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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