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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8년 9월 28일 (연중 26주일) 강론초 (마태 21:23-32 예수님의 권한, 두아들의 비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9. 27.


2008년 9월 28일 연중 26주일 성서말씀

에제 18:1-4, 25-32

1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2 "'아비가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 아이들의 이가 시큼해진다.' 이런 속담이 너희 이스라엘 사람이 사는 땅에 퍼져 있으니 어찌 된 일이냐? 3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너희 이스라엘에서 이런 속담을 말하지 못하게 하리라. 4 사람의 목숨은 다 나에게 딸렸다. 아들의 목숨도 아비의 목숨처럼 나에게 딸렸다. 그러므로 죄지은 장본인 외에는 아무도 죽을 까닭이 없다. 25 너희는 이 야훼가 하는 일을 부당하다고 한다마는, 이스라엘 족속아, 들어라. 너희가 하는 일이 부당하지 내가 하는 일이 부당하냐? 26 옳게 살던 자라도 그 옳은 길을 버리고 악하게 살다가 죽는다면 그것은 자기가 악하게 산 탓으로 죽는 것이다. 27 못된 행실을 하다가도 그 못된 행실을 털어버리고 돌아와서 바로 살면 그는 자기 목숨을 건지는 것이다. 28 두려운 생각으로, 거역하며 저지르던 모든 죄악을 버리고 돌아오기만 하면 죽지 않고 살리라. 29 너희는 내가 하는 일을 부당하다고 한다마는, 이스라엘 족속들아, 너희가 하는 일이 부당하지 내가 하는 일이 부당하냐? 30 나는 너희 하나하나를 너희의 행실대로 다스리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족속들아, 너희의 행실을 고쳐라. 거역하며 저지르던 죄악을 모두 버리고 마음을 돌려라. 그래야 올가미에 걸려 망하지 아니할 것이다. 31 거역하며 저지르던 죄악을 다 벗어버리고 새 마음을 먹고 새 뜻을 품어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너희가 죽다니 될 말이냐? 32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사람이 죽는 것은 나의 마음에 언짢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살려느냐? 마음을 고쳐라. 

시편 25:1-9

1 주여, 내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뵈오|며 ∥ 나의 하느님, 당신만을 |믿습|니-|다.
2 그러므로 부끄러운 꼴 당하지 않게 |하시|고 ∥ 원수들이 으스대지 못|하게|하소|서.
3 당신만을 믿고 바라면 망신을 당하지 |않으|나, ∥ 당신을 함부로 배신하는 자 수치를 |당하|리이|다.
4 주여, 당신의 길을 가리켜 |주시|고 ∥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주소|서.
5 당신만이 나를 구해 주실 하느님이시오니: 당신의 진리 따라 나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소|서. ∥ 날마다 당신의 도움만을 |기다|립니|다.
6 주여, 당신의 |자비|와 ∥ 한결같으신 옛 사랑을 |기억|하시|고
7 젊어서 저지른 나의 잘못과 죄를 잊어 |주소|서. ∥ 주여, 어지신 분이여, 자비하신 마음으로 나를 |생각|하소|서.
8 주여, 당신은 바르고 어지|시기|에 ∥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치시|고
9 겸손한 자 옳은 길로 인도|하시|며 ∥ 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필립 2:1-13

1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2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그렇게 해서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주십시오. 3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4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보십시오.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6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10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12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함께 있을 때에도 언제나 순종하였거니와 그 때뿐만 아니라 떨어져 있는 지금에 와서는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13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마태 21:23-32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24 "나도 한 가지 물어보겠다.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 일을 하는지 말하겠다. 25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하늘이 준 것이냐? 사람이 준 것이냐?" 하고 반문하시자 그들은 자기들끼리 "그 권한을 하늘이 주었다고 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할 것이고 26 사람이 주었다고 하면 모두들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으니 군중이 가만 있지 않을 테지?" 하고 의논한 끝에 27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또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먼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도 같은 말을 하였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이겠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셨다.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를 찾아와서 올바른 길을 가르쳐줄 때에 너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자비하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낮추시어 죽기까지 순종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하시어, 우리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섬기며 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한 분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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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기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일입니다. 이론적으로는 간단하지요.^^그러나 실제로는 어렵기 짝이 없습니다.

우선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가 문제가 됩니다.

아,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다구요? 그렇지요. 그런데 과연 그런가요?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해석과 실천이 제 각각인 것은 어쩐 일일까요?

교회의 가르침대로 살면 된다는 것도 중요한 답입니다. 그런데 종종 교회 공동체 자체가 분열의 위기에 놓이는 경우도 있느니 문제입니다.

요즘은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충분히 고민하여 분별하겠다는 이들도 많습니다. 대견한 태도이지만 상당히 불안한 선택임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과연 우리가 그대로 실천하며 살 수 있을까는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서는 바로 이런 문제들을 우리에게 깨우칩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권위”에 의지합니다. 제도적으로 인정된 권위, 전통적으로 전해진 권위, 많은 지지자를 갖고 있는 권위, 강력한 카리스마로 행사되는 권위, 우리는 대개 그러한 권위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조차도 권위있는 분으로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의지하여 하느님을 알고자 함은 물론 자연스러운 갈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권위를 세우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권위를 다른 곳에 기대거나 빌어오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예수님 자신의 존재, 기도, 말씀, 실천으로 충분하셨습니다. 때로 어떤 이는 예수님의 초라한 권위를 무시했고 어떤 이는 예수님의 인기를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를 어떻게 인정합니까? 하늘이 인정한 부활의 표징입니까? 사람들이 인정한 구원의 능력입니까? 우리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주실 수 있는 그 전지전능한 능력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일까요?  

오늘 1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읽습니다. 하느님은 냉혹한 심판자가 아니십니다. 징벌과 죽음을 자초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 스스로입니다. 돌이켜 죽음을 피하고 생명을 얻기를 하느님은 우리 자신보다도 더 간절히 원하십니다.

2독서는 예수님의 겸허한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간직하라고 권고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힘과 사랑의 위안과 성령의 사귐과 성도의 친교에 거하는 비결이라고 전합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권위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사사로운 욕심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뜻, 하느님 나라를 위한 열망으로 온전히 맑고 깊은 영이셨습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신 능력을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쓰신 일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한 권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는 마음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길은 예수님의 마음에 의지하여 하느님을 아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를 하느님의 권능과 일치시키려는 야망대신에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에 일치시키는 겸손을 택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예수님의 마음을 압니까? 정답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성경말씀을 숙고하고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깊은 사귐을 갖는 사람입니다. 이웃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아는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현실의 신앙생활에는 물론 신앙의 권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권위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잊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스스로의 권위를 늘 반성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교회공동체의 차원이든, 한 사람 신앙인의 차원이든 우리는 우리가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선언은 우리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권위있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신중해야 합니다. 가령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고 다니는 일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타종교인이나 불신자에게 혐오감을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반성이 있는가가 초점입니다. 신앙적인 주장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신앙하는 이의 고백입니다. 그 고백이 그 이의 마음에 얼마나 평화와 기쁨을 보장하는가, 그 이의 삶에 얼마나 자유로움과 행복을 보장하는가, 그 이를 포함한 공동체에 얼마나 건강한 사랑을 보장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 신앙인이 자신의 삶으로 하느님 나라를 증언할 수 있으면 참된 선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단순히 세상을 저주하는 이상한 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성전제사”과 “율법체계”를 통해 정죄하고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유지하며 자신들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자비와 심판을 선포하며 그 하느님께 죄를 용서받고 돌아가는 표시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율법체계에 따르면 도저히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세리나 창녀도 하느님의 마음에서는 엄연히 구원이 필요하고 가능한 하느님의 귀한 자녀들이었던 것입니다.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세례 요한에게서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자기반성의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자기들의 권위(실은 그 권위에 기반한 기득권)를 지키는 일에 더 관심을 두고 처신하였습니다. 결국은 성전과 백성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지요. 

하느님의 뜻은 인간들이 내세우는 명분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특정한 집단이 독점할 수 있는 고정된 행위규범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교리체계보다 훨씬 크고 자유롭고 살아있는 사랑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의 생각과 고집을 비우고 주님의 마음과 성령으로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2008. 9.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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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거룩한 부르심(聖召)에 순종하는 일

복음이 왜 복음일까요? 우리 믿음의 가장 중요한 내용,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저는 오랫동안 예수님 복음의 첫 선포인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애매, 모호, 막연, 아리송한 느낌만 가졌습니다. 그런데 문득 “하느님나라” 대신에 “하느님”으로 표현을 바꾸어보니 갑자기 그 의미가 선명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다가오셨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말씀으로, 이제 우리가 더 이상 하느님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서 우리 생각과 노력으로 하느님을 찾아 헤매고 하느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복음,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의 율법이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 마음에 들기 위한 인간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고, 그래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고 본 것이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먼저 몸소 우리를 찾아오셨다니!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그저 마음을 열고(= 회개하고) 하느님을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모시는 일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심”이 바로 복음 즉 기쁜 소식이었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 성자 하느님”으로 고백되었기에 성서는 단호히 우리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합니다.  

복음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다가 오셔서 다정하지만 분명하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 부르심은 하느님나라로의 초대이고 우리에게 거룩한 부르심, 곧 성소(聖召)로 경험됩니다.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약속합니다.

첫째는
사랑의 안식입니다.

더 이상 쓸데없는 수고를 그치고 그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편히 쉬라 하십니다. 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죄의식과 자기비하의 아픔으로, 종교적인 의무의 버거움으로 시달리지 말고 몸소 우리에게 오시어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 품에 쉬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소명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은 우연하고 덧없는 일들을 뒤섞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며 이끄시고 보살피시는 삶입니다. 우리는 사명을 받고, 위임을 받고 이 세상에 파송을 받았습니다.

“왜 사느냐?” 고 묻거든 “그저 웃지요”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제 일생은 그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일 뿐입니다” 대답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고, 먼저 부르시는 하느님의 성소에 응답하여 살아간다면 그 어떤 처지와 양태의 삶이라도 분명 구원 받은 삶인 것입니다. (2005.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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