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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7년 12월 30일 (성탄1주일) 강론초 (마태 2:13-23) (에집트로피신, 아기학살, 나자렛으로)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2. 29.

마태 2:13-23

13 박사들이 물러간 뒤에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어서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하고 일러주었다.

14 요셉은 일어나 그 밤으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6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박사들에게 알아본 때를 대중하여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버렸다. 17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 18 "라마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구나!"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9 헤로데가 죽은 뒤에 주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20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이미 죽었으니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 하고 일러주었다. 21 요셉은 일어나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다. 22 그러나 아르켈라오가 자기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가서 23 나자렛이라는 동네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예언자를 시켜 "4)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4)판관 13:5, 7참조.

“무상(無常)한 인생(人生)”을 “비상(非常)한 소명(召命)”으로

벌써 올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정말 쏜살같은 시간의 흐름입니다. “보람 있고 행복한 시간들 이었다”고 하면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겠으나 제 마음 한 구석에는 “덧없이 흘러가는 인생”의 느낌이 옅은 그림자처럼 자리하고 있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 덧없음은 제가 죄에 물들고 죽음의 위협을 받는 인간임을 드러내줍니다.

예수님의 탄생, 성탄이란 결국 우리들 인생을 죄와 죽음의 위협을 받는 그 덧없음으로부터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과 단절되어서 제 멋대로 제 고집대로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을 사랑으로 불러 관계를 다시 회복하시려는 성부의 뜻을 따라 우리 곁에 사람이 되어 오신 성자가 바로 아기 예수가 아닙니까?

하느님께서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진리와 사랑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우리들의 “무상(無常)한 인생(人生)”을 “비상(非常)한 소명(召命)”으로 살아가도록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예수님 일생의 각 사건들은 사람들을 두 가지 입장으로 갈라서게 합니다. 어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전해 듣고 그 분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섬기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 일을 걸림돌로 여겨 예수와 그리스도교를 멸시하고 박해합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의 하느님나라 가르침을 따라 제자가 되어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 가르침에 분노하여 예수를 배반하거나 작당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가 전하는 대로 예수의 성탄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별을 보고, 목자들은 천사의 소식을 듣고 아기예수를 경배하였습니다만, 헤로데는 그 아기 예수가 자기 왕권의 위협이 될까봐 죽이려고 드는 것입니다. 머지 않아 자신이 먼저 죽게 될 운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어리석고 추악한 권력자는 사정없이 터무니없는 살육을 저지릅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계속해서 알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또 순종하여 머나먼 피난길을 묵묵히 감수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의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일하시는 사건을 대하며 우리는 요셉처럼 깨닫고 순종(順從)합니까? 아니면 헤로데처럼 겁을 먹고 발광(發狂)합니까? 우리는 헤로데처럼 덧없고 추악한 인생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처럼 복된 소명의 삶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된 것을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성탄과 새해를 맞는 것입니다.† (2004년 12월 26일 강론초)

“인생- 헤로데가 아니라 나자렛사람으로” (마태2:13-23)

예수님의 성탄(聖誕)은 하느님의 강생(降生), 화육으로 고백됩니다. 유대의 마리아라는 여인에게 한 아기가 태어난 일이 하느님께서 우리와 같은 차원의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건이 시작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복음서는 기자가 아기의 탄생현장에서 생중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아시는 바대로 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훨씬 나중에 기록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느님으로 고백되는 것은 성령강림체험을 통해서 그리고 부활체험을 통해서 십자가사건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고 그 새롭게 눈 뜬 시각으로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돌아본 것이 복음서의 내용입니다. 복음서를 읽는 당시의 사람들에게나 오늘날의 우리에게나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생생한 이치가 중요하지 세세한 사실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서는 아기 예수가 당시 유대왕 헤로데의 위협 속에서 하느님의 인도하심으로 생명을 보존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기 예수는 장차 새로운 질서를 이 땅에 가져올 분입니다. “하느님나라”라고 불리는 그 새로운 질서의 주권자이신 “평화의 왕”이 되실 터입니다. 헤로데는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커녕 아기 예수의 존재가 자신의 세속적인 왕권을 위협한다고 착각하여 무수한 아기를 학살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는 얼마 안되어 자신도 죽고 말았습니다.

한 해 한 해를 지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룬 것, 얻은 것, 누린 것, 베푼 것들을 통해서 기쁨과 행복을 맛보았습니까? 감사와 찬양을 드릴 일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실패한 것, 잃은 것, 헛되이 보낸 시간들로 인해 슬픔과 고통을 경험합니까? 하느님의 깊은 위로를 받으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주체로서 경험한 어떤 일보다도 우리 “자신”에 관한 더욱 결정적인 질문이 남습니다. 우리는 결국 어떤 질서에 속해서 살았습니까? 하느님의 질서, 하느님의 나라입니까, 아니면 이 세상의 질서, 세속의 체제(體制)입니까? 그리고 나 자신은 얼마나 성장하고 성숙한 인격이 되었습니까? 나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세상 사람들, 전혀 낯선 이들까지 진실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형되었습니까?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를 당신의 형제로 깊이 이해하시고 우리 가운데서 하느님의 이름을 알리려 하신다고 표현합니다. 우리 또한 기꺼이 예수님을 우리와 같은 분으로 받아들이고 그 분께서 살아내신 “하느님나라”를 일생토록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요셉과 마리아처럼 아기 예수를 가슴에 품고 계속되는 “출애굽과 가나안 여정”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성탄절기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심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절기이고 동시에 우리가 예수님을 닮고 닮아 하느님나라에 살아가기를 소망하고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새해에 우리의 삶은 추악한 욕망에 사로잡힌 “헤로데”가 아니라 하느님께 구별되어 바쳐진 “나자렛(나지르) 사람”이 될 것입니다. ✠ (2007년 12월 30일 강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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