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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7년 12월 16일 (대림 3주일) 강론초 (마태 11:2-11 세례자요한과 예수님)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2. 15.

마태 11:2-11

2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3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읍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 4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5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6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7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 간 뒤에 예수께서 군중에게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9 그렇다면 너희는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그런데 사실은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다. 성서에, 10 '너보다 앞서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네 갈 길을 미리 닦아 놓으리라'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11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찌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

오시기로 된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마태11:1-12)

대림절을 지키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세례요한의 이 질문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물어보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장차 예수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지요.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그 소명을 잘 감당한 위대한 예언자였지만 족집게 점쟁이는 아니었습니다. 요한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불의 심판”이 아니라 “은총의 구원”이었고 “자비의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물봉헌이나 율법준수를 요구하시며 분노의 기색으로 사람들을 노려보시는 심판관 하느님이 아니라, 제멋대로 떠나간 아들을 마음다해 기다리는 자비로운 아버지 하느님을 전하셨고, 그 성부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이 바로 “소경을 보게 하고 절름발이를 걷게 하며 나병환자를 낫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며 죽은 사람을 일으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었는데, 이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질문에는 참으로 간절한 기다림과 동시에 자신이 기대했던 메시야 사역과는 차이를 보이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품는 의심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오늘 우리의 믿음 안에도 우리의 소원과 의심이 뒤섞여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을 바로 잡을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직접 “우리가 듣고 본대로”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정작 주님이 하신 일을 듣고 보지 못한 채 전해지는 말들로만 주님을 믿고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마치 감옥에 갇힌 상태로 예수님의 일을 전해 들었던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의심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죽은 사람, 가난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겸손하고 간절하게 주님 앞에 나아간다면, 우리가 주님의 자비하신 은총으로 치유 받고 회복되고 일으켜진 바로 그 사람이라면 우리는 “의심을 품지 않는 행복한 사람”, 주님을 참되게 증언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성탄과 주님의 다시 오심은 우리 밖에서 사실 정보 차원으로 벌어지는 사태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오시기로 된 바로 그 분”이 되심은 바로 우리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즉 주님은 이천년 전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과 동시에 모든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 믿음 안에 늘 새로이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바로 우리의 그 마음자리, 믿음자리를 준비하는 때입니다. ✠ (2004년 12월 12일 강론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려면 (마태11:1-12)

대림절을 지키며 우리는 예수님의 강생을 기념하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말이죠, 예수님이 이 땅의 우리 가운데 다시 오시면 그 분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무엇이 그 분을 알아보는 표가 될까요?

처음 예수님이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셨을 때에 사람들은 어떻게 그 분을 알아보았을까요? 오늘의 복음서는 그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며 우리의 분별력을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아는 대로 성경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수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별”이 나타나서 “동방박사”들을 인도합니다. 물론 요셉의 “꿈”에도 천사가 나타나지요. 루가복음에는 “천사”가 직접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잉태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천사들은 장차 그리스도가 되실 아기 예수님이 “구유”에 누워계신 소식을 들판의 “목자”들에게 나타나 알려줍니다. 마르코복음에는 태어나실 때의 신비한 이야기는 없고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소리가 들려왔다고 전하지요. 그리고 요한복음을 비롯한 네 복음서는 세례 받으신 이후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 들려주신 권위있는 가르침이 모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일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차분히 생각해보면 그 모든 신기한 일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결정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준 것이 아닙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는 일은 “신비하고 기적적인 사건” 자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려면 그리스도에 대한 간절하고 구체적인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일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일임을 깨우쳐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어떤 기다림이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과연 하느님의 나라, 그 온전히 이루어진 구원, 새로운 질서에 대하여 구체적인 비전(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개인적인 복락을 약속하는 낙원이나 천당을 넘어서는 비전입니다.

과연 우리가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그 하느님의 일을 예수님의 일로 경험하며 감격할 수 있는가요?

마태복음 25장의 말씀대로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자신과 동일하게 여기신 예수님을 우리가 알아보려면 “과연 우리가 무엇을 보려 했던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일을 보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눈이 감기고 귀가 닫힌 어떤 이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주님을 따르며 “듣고 보면서도” 제 견해를 못 바꾼 유다는 그만 의심을 키우다가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대림절은 막연히, 또는 제 욕심으로 어떤 “해결사”를 기다리는 때가 아닙니다. 우리 내면의 욕심을 비우고 지혜를 밝혀서 한없이 가난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조용히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실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가난한 이들, 힘없고 서럽고 외로운 이들에게 사랑의 눈길로 그 빈 손을 마주 잡아주는 이는 “의심을 품지 않는” 행복한 신자입니다.✠ (2007년 12월 16일 강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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