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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무엇으로 감사할까?

by 분당교회 2020. 11. 14.

2020년 11월 8일 연중 33주일

추수감사주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신부

루가 17:11-19

 

모세오경 통독 잘 하고 계시지요? 이번 주간에 레위기로 넘어갑니다. 이번 주간 범위를 보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예배 지침이 나옵니다. 번제, 곡식예물(소제), 친교제(화목제), 속죄제, 면죄제(속건제) 등 다섯 가지입니다. 

 

이 제사들은 마치 우리가 매주일, 혹은 매일 감사성찬예배를 드리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일상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일상의 예배 말고도 특별한 절기를 지켜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과월절, 추수절, 초막절입니다. 신명기 16:16, 일 년에 세 번, 과월절과 추수절과 초막절에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고르신 곳에 와서 그분의 얼굴을 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빈손으로 야훼의 얼굴을 뵈러 오면 안 된다. 

 

현대 교회에서는 이 3가지 절기를 과월절은 부활절로, 추수절은 맥추감사주일로, 그리고 초막절이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이런 특별한 절기를 명하신 이유는 일상의 예배가 습관화되기 때문입니다. 예언서들을 보면 마음으로는 우상을 따르면서 형식적으로 야훼가 명한 제사를 드리는 예배의 타락이 나옵니다. 예배가 타락했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이 추락해 버렸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우리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의 이름이 감사성찬예배인데, 얼마나 진정으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지 돌아봅니다. 우리에게도 돈 성공 건강 등을 복으로 여기고 그 복을 누릴 때만 감사하고 평소 드리는 예배가 습관화되어 있는 건 아닌지요?

 

물론 바라는 것이 성취되는 감사할 일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감사할 일이 많지 않은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고 병이 들기도 하고 피하고 싶은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일본어로 감사하다는 말이 ‘아리 가또’입니다. 그 단어를 한자어로 표기할 때 ‘있을 유’에 ‘어려운 난’ ‘유난有難’이라고 쓴다고 합니다. 우리는 무난해야 감사한데, 일본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는 것을 감사로 여기는 것입니다. 워낙 지진 태풍 등 엄청난 자연 재해 가운데 살아와서 그런가 봅니다.

 

오늘 복음에 유난有難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나병 환자 열사람입니다. 고통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좋은 소식-복음이 들려왔습니다. 나자렛 예수가 동네에 오셨다는 소식입니다.

 

일정거리 이상 사람들과 떨어져 있어야 했기에, 예수를 향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부르짖었습니다. 13절,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크게 소리쳤다.” 천지를 진동시킬 정도로 절규했을 것입니다. 간절함과 절박함이 느껴집니다. 

 

루가복음 18장 35절부터 보면, 여리고의 소경도 지나가던 예수님을 향해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런데 앞서가던 사람이 소리치지 말라고 꾸짖으니까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것이 기도입니다. 오직 하느님 밖에는 의지할 수밖에 없어 간절하게 부르짖는 것 자체가 기도입니다. 

 

사랑의 주님은 우리의 부르짖음, 신음을 듣고 응답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느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귀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예수님이 나병환자 열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14절,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하셨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 

 

레위기 13장 9절에 “사람에게 문둥병이 생겼을 경우에는 그를 사제에게 데려 와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제가 의사의 역할도 해서 나병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사제가 병이 나았다고 하면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 하실 때는 병이 낫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아직은 나병이 있는데, 사제에게 가라고 하는 이런 상황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나병환자 10명은, 율법에 따르면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인데, ‘사제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여주라’는 예수님의 말씀만 믿고 마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 = 말씀 + 순종. 

 

이 믿음으로 문둥병자 10사람은 치료하시는 하느님을 경험했습니다. 14절 후반,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면 말씀대로 일하시는 하느님을 경험합니다

 

여기서부터 더 중요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치유 받은 나병환자 열 명 중에 단 한 명만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개 취급하는 인종적으로도 천대받던 사마리아인 그 한 사람만이 예수님 앞에 돌아와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감사성찬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음을 입은 사람은 열 명인데.... 왜 너만 돌아왔느냐? 나머지 아홉은 어디로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 드리러 돌아온 사람이 사마리아인인 너 밖에 없단 말이냐?” 예수님이 왜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어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살렸다” 구원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쏘테리아’입니다. 대적으로부터의 해방, 보호, 죄로부터의 구속, 영생, 그리고 성화(聖化)의 과정을 뜻합니다. 또한 치유, 건강, 염려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평안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병으로부터 나음을 입은 것도 구원 사건입니다. 기도해서 문제 해결 받는 것도 구원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영혼의 구원! 하느님이 아버지 되시고 그분의 자녀가 되는 관계의 회복 말입니다.

 

나병 환자 열 명 모두 몸이 치유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문제가 해결되고 소원이 성취되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바라시는 구원에 이른 사람은 사마리아인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나음을 입은 사람은 열 명인데.... 왜 너만 돌아왔느냐? 나머지 아홉은 어디로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 드리러 돌아온 사람이 사마리아인인 너 밖에 없단 말이냐?”

 

다른 아홉 사람도 다 이 구원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 안에서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 안에서 행복한 인생’ 이것이 최고로 복된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살게 하는 오직 한 가지 비결이, 사마리아 그 한 사람이 보여준 감사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서신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고 명령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데, 주님은 이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의 세월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그 세월동안 얼마나 큰 고통을 겪어야 했을까요? 

 

나병환자들을 치유하여 주신 하느님은 반드시 우리에게도 찾아오시고 구원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그 구원을 받기까지 긴 세월이 걸리기도 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을 겁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주님을 신뢰하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이신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지금 100세가 넘으셨는데도, 강연도 하시며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분의 사모님이 60세에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80세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김교수님은 은퇴 후 함께 여행 다니자고 한 약속을 지키고자 아내가 소천 하실 때까지 몸이 불편한 부인을 데리고 여행을 다니셨다고 합니다. 

 

역시 늙은 큰 딸이 아버지인 김교수님께 100년을 살아온 인생이 어땠냐고 물었습니다. 김교수님은 인생을 통해 배운 것은 인내하는 것이었다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타락한 세상 한 가운데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인내를 필요로 하지요. 이렇게 인생을 살다가 주님께 돌아가 안식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하여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는 사람들은 역경 가운데 주님의 은총을 돌아보며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예배자로 섭니다. 이런 내용의 글이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적혀 있습니다. 꽤 유명한 글입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독하고 외로운 것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도록 틀어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의 교만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돈이 떨어지고 사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사게 하신 것도 감사합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공부를 기대만큼 안 하고, 아내가 미워지고, 어머니와 형제들이 짐스러워질 때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저의 우상이 되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허무를 느끼게 하고, 때로는 몸이 늙고, 아프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럼으로 인하여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부정이 득세하는 세상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제게 잘못하고 저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럴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어젯밤, 잠 못 이루고 뒤척이게 한 것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병들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을 더욱 감사합니다.“

 

코로나 19로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 고통스럽고 막막한 분들도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또한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너무 어려워서 하느님을 원망하고 불평해도 괜찮습니다.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알기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내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은총일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 가운데 있는 지체나 이웃들이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갈 수 있도록 도우라고 우리 교회가 존재합니다. 

 

오늘 읽은 1독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16:14, 너희는 이 축제를 올리면서 아들과 딸, 남종과 여종, 너희가 사는 성문 안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도 함께 즐기게 해야 한다.

 

그래서 올 해도 우리 교회는 추수감사주일 헌금의 일부를 서울교구 코로나19 재난극복기금으로 봉헌합니다. 우리도 월세를 사는 넉넉지 않은 형편이지만, 교우 여러분의 헌신으로 이렇게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더 많이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바라는 것을 응답받거나 세상이 말하는 복을 누리게 되어 감사하는 것을 넘어서는 예배자가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녹록치 않은 인생의 여정에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의 은총을 헤아릴 줄 아는 믿음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하늘의 평화와 소망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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