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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깨어 있으라!

by 푸드라이터 2020. 11. 17.

2020년 11월 15일 연중 33주일

설교 말씀

이정구 어거스틴 신부

마태 25:14-30

 

오늘 서신 데살로니카 전서는 ‘주님의 날은 밤중에 도둑처럼 온다. 빛의 자녀들아, 너희는 어둠에 속하지 않은 대낮의 자녀들이다. 술도 어두운 밤에 마신다. 그러니 너희는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럼 자지 말라는 얘기냐? 사악한 목회자는 이 구절을 제시하면서 교인들에게 밤에 자지 말고 매일 밤 철야 기도회에 나오라고 할지 모릅니다. 

 

창세기를 보면 태초에 빛이 있었습니다. 빛은 말씀이었고, 어둠은 이 빛을 이겨 보고 싶어도 이길 수도 없습니다. 빛은 혼돈의 어둠에 질서를 가져다줍니다. 캄캄한 실내에서는 성냥 불빛 하나로도 사물을 분간하고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그렇지 않아도 현대인들은 수면 부족 불면증으로 고생하는데 이를 더 가중시키라는 것일까요? 제가 어릴 때 ‘새나라의 어린이는 자기도 전에 일어납니다’ 라고 가사를 웃기게 바꾸어 불렀던 적이 있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밤에 잠도 자지 말고 보초를 서듯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빛으로서, 어둠의 세상에서 최소 성냥 불빛만큼의 역할이라도 하면서 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빛이 나오는 불을 꺼트리지 말고 어둠을 비추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좁게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해야 할 의무이지만, 좀 넓히면 혼돈과 어둠의 세상에서 교회가 해야 할 빛의 기능이기도 합니다. 

 

어둠이란 공의롭지 못한 국가 정책일 수 있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일 수 있고, 재벌 기업의 불공정 거래일 수도 있고 인권유린 일 수 있고 성차별일 수 있고, 부도덕한 인간들의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그러진 현대교회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무엇이 공의이고 불의인지를 감시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를 분간하려면 이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분별기준은 성서 안에 들어 있습니다. 성서를 모르면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알 수 없고 분별기준도 자기 마음대로 정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수없이 들어온 다섯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원래 비유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것인데 이 비유에 또 비유를 들어 설교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기는 합니다. 

 

각자 능력에 따라 한 명은 다섯 달란트를, 또 한 명은 두 달란트를, 남은 한 명은 한 달란트를 받습니다. 이것은 주인의 눈으로 봐서 세 명의 종이 각각의 능력에 따라 받았는데 이 각자의 능력이 어떤 능력인지는 그 종의 주인이 평가한 잣대였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주인이 돌아오자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더 벌어 열 달란트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왜냐면 이 종은 원래 능력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종이 어떤 방식으로 돈을 활용해서 다섯 달란트를 벌어왔는지 성서에 없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은 종과 다르게 돈을 받자마자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종은 곧바로 어디로 갔을까요? 세종시로? 부동산 중개업소로? 부동산 경매장으로? 아니면 주식시장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성서에는 없습니다. 그 종은 어딘가로 곧 가서 받은 돈 다섯 달란트를 활용해서 두 배를 벌어옵니다. 주인이 이를 보고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라고 칭찬하며 큰일을 맡기겠다고 합니다. 

 

비유가 달란트라는 돈 단위라서 현대사회에 적용하기가 좀 불편합니다만, 성서를 보면 주인이 종들에게 돈을 맡기고 돈을 더 벌어오라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종들의 능력에 따라 나누어 주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눈치가 빨랐고 주인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성공하고 싶은 이 기회를 놓치기 싫어 단시간에 돈을 최고로 많이 벌 수 있는 곳으로 곧바로 달려갔습니다. 분명히 이 종은 충성 된 종인데 착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착하다면 다섯 달란트를 벌어서 자신이 떼어먹지 않고 번 돈 모두를 주인에게 바쳤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 명의 종은 모두 착한 종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묻어 놓고 받았던 달란트를 그대로 가지고 온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르다고 호통을 칩니다. 요즘 은행 이율이 낮아 오만 원 권을 집 금고에 그대로 싸 놓고 있는 부자들이 많아 오만 원권 지폐 구경하기가 힘들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번 라임사태로 아주 큰 돈을 날린 친구가 있습니다. 잘 됐다면 이 친구는 단기간에 엄청난 이율로 인해 충성스럽고 착한 친구가 됐을 텐데 몽땅 날리고 말았습니다. 아니면 이 친구는 높은 이율 바라고 불로소득을 하려고 했으니 당해도 싸다고 비난을 들어 마땅한 나쁘고 게으른 자일까요? 

 

능력이 없어서 한 달란트밖에 받지를 못한 종은 주인이 두려워 애초부터 주눅이 들어 있던 차에 이마저 날리면 큰일 날까 싶어 땅에 묻어 두었던 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종에게는 어떤 잘못이 있을까요? 어딘가에 과감히 투자하지 못하는 소심 죄?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한 달란트를 잃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온 것만도 대단한 것입니다. 왜냐면 그만큼이 그 종의 능력이니까요. 그런데 주인은 능력에 따라 맡겨 놓고는 돌아와서는 점수를 따지고 있습니다. 

 

아내가 제게 오백만 원을 맡겨 놓고 여행 갔다가 돌아와서 맡긴 돈을 돌려달라고 하면 저는 은행에 저금하지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이 돈을 날릴까 봐 주식이나 투자는 못 할 겁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내는 이런 저에게 ’아이고 이 한심하고 멍청한 사람 같으니 내가 이런 사람과 살고 있으니 평생 이 꼴로 살지 아이고 남들은 펀드니 주식으로 잘도 벌어오던데‘ 라고 한다면 저는 나쁘고 게으른 남편인가요? 아내는 제 능력을 보고 처음부터 아예 맡기지도 않을 겁니다. 딴 곳에 안 쓰고 그대로 돌려주기만 해도 칭찬받을 겁니다. 왜냐면 저는 아내의 종이 아니니까요. 

 

성서는 현대사회에 적용하기 아주 불편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새로 써야 한다는 학자들의 의견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긍정적으로 이 비유 말씀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잠잘 틈이 없었을 것입니다. 컴퓨터 켜 놓고 매 순간 주식변동을 봤거나 경매장소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녔거나 엄청 바빴을 것입니다. 자기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주인을 위해서 밤잠 설치며 충성스럽게 자기도 전에 일어나 돈 벌 궁리만 했을 겁니다. 자전거 타러 가거나 등산할 마음조차 못 갖고 건강도 좀 해쳤을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부동산 투기나 주식을 할 능력도 없고 그 생각마저 못 했을 것입니다. 어차피 자기 돈 버는 것도 아니고, 자칫하면 쫒겨날 판이니 그냥 금고에 넣어두었다가 주인이 돌아오면 돈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돌려드리는 것만 해도 어디냐며 자족하면서 잠도 충분히 잤을 것이고 무서운 주인이 없으니 세상에 이처럼 마음 편할 수 없엇을 것입니다. 틈나면 저처럼 자전거도 타고 산에도 갑니다. 

 

그러나 황당한 것은 돌아온 무서운 주인으로부터 이 종은 상상도 못 했던 인신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능력이 부족하여 한 달란트 밖에 받지못했던 이 종은 자신이 왜 주인한테 이런 욕을 얻어먹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당했을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이 주인은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고 맡긴 돈의 몇 배를 손해배상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욕을 얻어먹은 한달란트 짜리의 종은 주인을 고소할 능력도 생각조차 없었을 겁니다.

 

이제 오늘 복음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답은 분명해졌습니다.

 

주인은 종 세 명에게 말은 안 했지만, 돈을 더 벌어올 것을 기대하면서 돈을 맡긴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돈을 더 많이 벌어오라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받은 달란트를 십분 활용하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십분 활용하라는 것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처럼 게으르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잠잘 것 다 자고 놀 것 다 놀면서 받은 달란트를 십분 활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 내 능력을 활용해야 하느냐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인 된 주님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받기 위해 또 전보다 더 중요한 사역을 맡기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중에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그 순간이 바로 구원이며 천국입니다. 그때 가라지가 아닌 알곡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모두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들이 모이는 곳은 아닙니다. 교회가 지능이 낮은 자의 지능을 높여 줄 수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지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각자 받은 달란트를 최선으로 활용할 수 있는 종이 되도록 양육을 하는 곳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들이 내 이웃이라면 오늘 데살로니카 서신 말씀처럼 그대로 지금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서로 격려하고 돕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각자 능력이 달라서 받은 달란트도 각자 다르지만, 지금의 자리에서 내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이라고 해서, 능력이 조금 낫다고 해서 두 달란트를 받았거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을 비난하거나 그 앞에서 잘난 척 말고 서로 격려하고 도와서 함께 열심히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면 두 배, 세 배, 백배의 결실을 거두게 되어 후에 주님으로부터 칭찬받고 큰일을 맡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개인의 역할에서 이것을 확장하면 이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자명해졌습니다. 어둡고 혼탁한 세상에서 교회는 세상의 빛입니다. 교회도 사람처럼 각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받은 종으로서, 이웃한 지역교회들과 연대하고 도우며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처럼 다양한 하느님의 사업에 최선을 다할 때 교회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후에 주님께서 그 교회를 추려 칭찬하시고 어디서든 더 큰 사역을 맡기실 것입니다. 내 이웃을 꼭 주님께로, 교회로 인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들을 격려하고 도와서 코로나, 온난화, 환경, 불공정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후세를 위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도록 깨어 기도하고 실천하는 것이 다섯 달란트를 받은 교회의 역할입니다.

 

깬다는 것은 자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다는 깨어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듯합니다. 코로나 시기에 모든 것이 우리를 번잡하고 우울하게 하지만 깨어서 깨닫는 한 주간이 되어 이에 굴하지 않고 최선으로 내가 받은 재능을 십분 활용하며 봉사하는 한 주간 되시길 빕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내가, 그리고 교회가 어떤 일과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깨어 깨달아 실천하는 한 주간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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